하루는 아이가 좋아하는 거, 아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공통적인 의견이 “우리 아이는 특별히 잘하는 게 없어서 공부시키려고 해요.”였다. 예전에 학부모 상담할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학부모가 돼서 다시 듣게 되니 약간 의구심이 들었다.
‘잘하는 게 없어서 공부를 시킨다고? 재능까지는 아니어도 좋아하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그것이 공부가 아닐 수도 있고, 아이가 원하는 길이 따로 있다면…’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니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내 아이에게 재능이 있다 함을 월등한 탁월함으로 생각했다. 피겨 스케이팅을 좋아한다고 하면 김연아를 떠올렸다. 축구 선수를 꿈꾼다고 하면 박지성을 떠올렸다. 그 이하가 없었다. 그 정도의 재능이나 기량이 나타나야, 공부가 아닌 다른 길을 생각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바로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냥 속으로 물었다.
‘그럼 공부도 하버드를 목표로 하는 거지요?’
축구 선수가 꿈이라고 말했을 때 재능이 뛰어나서 응원했던 게 아니었다. 운동 신경이 있어서 살짝 잘하는 편이라는 걸 부모인 우리는 알고 있었다. 다만, 정민이가 무척 좋아했고, 몇 년 동안 축구 선수라는 꿈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지지해줬다. 나중에 관심사가 바뀌어 다른 꿈이 생길 수도 있다. 본인 스스로 길이 아님을 깨우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축구라는 운동 분야에 축구 선수만 있는 게 아니다. 감독, 코치, 운동치료사, 해설가, 에이전시 등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체육 교사가 될 수도 있고, 스포츠클럽을 운영할 수도 있다. 축구 코치를 직업으로 할 수도 있다. 본인이 좋아서 가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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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하교 시간에 정민이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인데, 가끔 돈에 대해 질문할 때가 있다. 아빠 급여는 얼마인지, 월급을 많이 받는 직업은 무엇인지 등등. 하지만 어렸을 때는 돈에 관심이 없었다. 돈 욕심이 없어서 세뱃돈을 많이 받든 적게 받든 괜찮은 아이였다. 나중에 용돈을 받아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터라 가끔 하는 질문이지만 반가웠다. 대부분 순간 호기심으로 질문하고 끝내지만, 그 후에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돈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정민이가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나왔다. 엄마가 독서하고 있던 카페로 왔다. 차로 이동하려는데 코코아를 사고 싶은 눈치였다. 아침부터 당분 섭취도 많이 했고 바로 차 타고 이동할 예정이어서 굳이 안 먹어도 될 상황이었다. 미련이 있는 듯하여 원하면 용돈으로 사 먹어도 된다고 했다. 3,900원! 3,000원이면 부담이 없겠다며 엄마가 900원만 지원해주길 원했다. 거절하려다가 두 가지 이유로 동의해줬다. 첫째는 동전 생기는 걸 안 좋아한다는 점이다. 십만 원 깨기 싫어서, 만원 깨기 싫어서 소비를 안 하는 심리라고나 할까. 두 번째는 아이
랑 나누려는 대화 속 계산식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코코아 한 잔 가격인 3,000원은 용돈의 몇 퍼센트인지 물어봤다. 잠시 계산하더니 25%라고 대답을 했다. 요즘 수학 시간에 비율 단원을 배우고 있다고 해서, 실생활에 적용하는 질문을 했더니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수입과 지출 이야기도 나눴다. 느낌을 물어봤더니 3,000원은 크게 안 느껴졌는데, 용돈을 기준으로 하니깐 큰 금액을 쓴 것 같다고 했다. 평소에는 군것질을 잘 안 하니깐 가끔 네가 원하는 곳에 쓰고 만족도가 높으면 잘 소비한 거라는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룸미러 속에 보이는 아이의 표정을 보니 달달한 맛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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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럭무럭 자라는 정민이를 보면 오지기도 하고 뿌듯하다. 동시에 마음 한 곁에는 안쓰러움도 있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독립해서 본인의 삶을 찾아가는 여정을 생각하면 벌써 마음이 아리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건 아이가 성장통으로 겪어야 할 통과의례이니 부모인 나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기특한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아이 인생 대신 살아줄 것 없기에 이 또한 부모가 대신해줄 수 없는 노릇이다. 해낼 수 있다 응원해주며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해줄 뿐 안쓰러운 마음은 부모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녀는 자녀대로 성장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성숙해지는 게 아닐까 한다.
걸음마 배우는 아이가 뒤뚱거릴 때 넘어질 것 같으면 매번 미리 잡아주고, 혹시나 넘어질 때 바로 일으켜 세워준다면 걸음마 배우는 속도는 더딜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한 걸음 내딛는 도전과 연습 속에서 걸음마를 하게 된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도 마찬가지다. 시작은 도와줄 수 있지만, 결국 스스로 연습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넘어져 봤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안 넘어질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다. 정강이나 무릎에 영광의 상처를 남기며 배운 자전거는 타는 모습에서 자신감이 넘쳐난다.
인생은 등산과 같다. 매 순간 고비를 만난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겠다 싶을 때도 있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다치는 경우도 많다. 좀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한 때도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잠시 멈출 수도 있고 조금 쉬어갈 수도 있지만, 결코 놓지는 말아야 할 삶의 원칙, 바로 이것이 회복탄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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