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은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세대 간에서도 그렇다. 그날 내가 캐나다에서 연주한 베토벤 협주곡은 200년 전에 작곡되었다. 아마 그날의 관객 중에는 100세가 다 되어가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공연이 끝난 뒤의 저녁 식사에서는 지휘자와 악장이 내게 자기 아기 사진을 보여주었다. 클래식 음악은 세대를 넘나든다. 시대를 초월하고, 만인 공통이며, 영원히 늙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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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가 될까 고민하던 시기에 나는 논쟁에서 이기기보다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매료되었다. 실제로 겸손과 인내, 사려 깊은 망설임으로 논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 방법일지 모른다. 나는 연주회에서 이러한 종교적 의미를 강렬하게 느낀다. 무대로 걸어 들어가면 관객을 대면한 뒤 몸을 옆으로 돌려 자리에 앉는다. 이때 관객 대부분은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의견은 의자에 앉은 엉덩이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나는 나의 관객과 친구가 되고 싶다. 설교를 하거나 그들을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작곡가의 탁월한 목소리를 통해 모두가 논란과 갈등을 넘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직접 말을 건다면(어쩔 수 없이 내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관객에게 정치나 종교에 관해 연설하는 것은 언제나 설교일 수밖에 없다)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제거할 수 없는 분열이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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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와 비교해보자. 사람들은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에게 ‘뭐라고요? 또 훈련 중이라고요…? 하지만 이미 라켓 쥐는 법도 알고, 경기도 엄청 많이 치렀고, 지금 몸 상태도 좋잖아요.’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복잡한 작품을 다시 연주하는 것은 처음 그 작품을 배우는 것만큼 시간과 노력이 들지 않는다. 뛰어난 테니스 선수가 공을 쳐서 네트 위로 넘기는 방법을 잊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 배우는 작품을 외워서 연주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노력이, 이미 아는 작품을 정말 ‘준비된’ 상태로 만들기까지의 노력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3악장 중간의 쏟아지는 32분음표를 익히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지만, 그 음 하나하나에서 내가 원하는 음색과 형태, 균형감, 페달링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한 작업이다. 이것은 공개 수업에서 한 작품을 정확하고 탁월하게 연주한 학생에게 내가 가끔 하는 말이기도 하다. ‘훌륭해요. 하지만 이건 진짜 연주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토대에 불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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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은 거리를 두고 사물을 바라보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500년 전에 쓰인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면서 여전히 그 목소리가 현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곧 인간의 경험을 압축해 과거의 지혜와 열정을 직접 경험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일부 즐길 거리와 달리 클래식 음악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연주회가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을 뒤에 남겨두지 않는다. 오히려 작곡가와 함께 인간 존재의 가장 심오한 일부를 탐험한다. 음악은 우리를 치유한다. 음악은 진통제가 아니라 항생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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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하루에 곡 전체를 연습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규모가 큰 소나타의 경우 화요일에 1악장을 연습하고 나머지는 목요일에 연습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짧은 곡에서도 이 방법이 유용할 수 있다. 쇼팽 발라드 4번(그 어떤 피아니스트의 손에도 어려운 곡)을 연주한다고 하면, 하루에 마지막 세 페이지 정도만 연습한다. 특히 어려운 지점에 집중해서 차분하고 냉정하게 한 시간 정도 연습한 뒤, 옆으로 치우고 다른 곡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면 연습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다. 까다로운 코다를 맥락에서 떼어내 신중하게 연습하면 조명이 무대를 환히 밝히고 마이크가 피아노 옆에서 코를 들이밀고 있을 때 더 안심될 것이다.
--- p.166
리스트가 19세기만큼이나 20세기의 음악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프란츠 리스트가 태어난 지 200년이 넘었다는 문장은 오타를 친 것처럼 보인다. 하프시코드의 울림 속에서 태어난 리스트는 현대 피아노의 등장과 발전에 가장 큰 영감과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여러 곡이 뒤섞인 연주회 프로그램에서 피아니스트가 한 곡 정도만을 연주하던 세상에서 자라난 리스트는 결국 피아노 리사이틀(그가 만들어낸 말이다)이라는 것을, 저녁 내내 자신에게 집중하는 열렬한 관객을 옆에 두고 무대 한가운데에서 연주하는 스타 피아니스트를 발명했다. 가장 훌륭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었던 리스트는 늘 다른 작곡가의 음악을 자기 연주회 프로그램에 넣었다. 옛날에는 작곡가가 대개 자기 음악을 연주했고 그렇지 않은 곡은 아예 연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는 경향이 있는데, 동료들을 향한 관대함이라는 면에서 리스트에 필적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리스트를 넘어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p.268
오페라하우스 옆을 수없이 많이 걸었지만 내가 변했다는 느낌(일시적인 기분일지라도)이 들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동안 가능한 모든 각도에서 이 건물을 바라보았고, 태양과 구름이 이동하면서 타일의 빛깔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차갑고 간결한 윤곽을 손으로 여러 번 쓸어보았고, 대기실과 카페테리아에서 수십 번 항구를 내다보았다. 오페라하우스는 탁월한 건물이 거의 독보적으로 유레카의 순간을 반복해서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건물들은 자신이 위치한 공간으로 시간을 확장한다. 그림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둘러싼 공기를 밀어낸다. 건물과 관계가 가장 가까운 조각조차도, 아무리 무겁고 거대하더라도, 어떻게서든 위치를 옮길 수 있다. 조각은 어느 장소에 내려놓을 수 있지만, 건물은 자신이 곧 ‘그 장소’다.
--- p.353
신은 죽음을 허락한다. 신이 죽음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매초 수많은 폐가 호흡을 멈추고 심장이 박동을 멈추며 필수 장기가 위축되고 부패한다. 우리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삶을 연장하고 싶어 하고, 신은 천국에서 파멸을 가리킨다. 가끔은 이러한 신의 행위가 완전히 제멋대로에 무작위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잔혹한 우연의 세계다. 그러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신을 믿는다면, 우리의 상상보다 더 거대한 규모로 죽음을 다루는 신 또한 받아들여야만 한다. 신의 핵심에는 학살의 블랙홀이 있다.
--- p.413
예술의 방백, 영원히 이어지는/ 음악과 그 밖의 것들의 대화.
--- p.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