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학자에게 ‘생각을 위한 양식(food for thought)입니다. 학자는 무엇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배우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배우지 않고서는 학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학자는 읽고 쓰고 생각하는 활동으로 살아갑니다.”
_ 강영안의 『읽는다는 것』
타자의 연구나 저술은 귀한 선물이다. 다만 그것을 알아보는 이에게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을 통해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기에 그것을 발견한 내가 내게 전하는 선물이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란 것이 그리 내세울 건 없지만, 어떤 지식 체계나 근거에 비추어 보다 구체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내 경험이나 얄팍한 지식이 타자의 연구나 저술을 근거로 보다 확실성에 접근하고, 그로 인하여 구체적인 진리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선 사람들의 글을 통해서 내 작은 경험을 깊고 넓게 확장시킬 기회를 잡을 수밖에.
앞의 글에서 ‘학자’를 ‘작가’로 바꾸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롯이 쓴다는 것에만 열중할 수 없기에 읽기가 그만큼 중요한 작가. “오직 책만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든다. 모든 작가는 독자였다. 작가는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하여 그것을 다시 쓰는 사람이다”라고 한 김영하 소설가의 말은 그러므로 적절하다. 자양분이 없는 생물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읽기는 지적 축적뿐만 아니라 간접 체험으로 확대될 때 더욱 풍요로워진다.
눈으로 읽는 것, 귀로 읽는 것, 손으로 읽는 것 등 다양한 읽기를 떠올려 본다. 흔히 읽는다는 것은 눈과 뇌 작용의 협업이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손과 귀를 빌려 온다. 점자가 그렇고 오디오북이 그렇다. 어쨌든 읽기다. 읽는 것을 위해 무엇인들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부족함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그것을 찾아 이용한다. 살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고 살아가기 위해 배설하듯 살기 위해 읽고, 또한 살기 위해 기록(쓴다)한다. “읽기는 학자에게 마치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저자도 말하지 않는가. “나는 읽는다. 고로 작가다.”
---「읽는다는 것」중에서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_ 보후밀 흐라발의 장편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인간은 어쩌면 걸어다니는 잡학사전이 아닐까. 그래서 온갖 지식을 뇌에 저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뇌는 처음부터 지금의 크기는 아니었다. 인류의 기원을 따져 보면 인간은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불을 사용하거나 도구를 사용하고 언어를 사용하면서 뇌의 크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어느 다큐에서 본 인류의 기원에서는 머리가 좋은 인류(원인류)가 죽자, 그의 지혜를 얻고자 뇌를 꺼내 나누어 먹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앎에 대한 욕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방대한 지식을 저장하기에 인간의 뇌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망각이라는 다른 한편의 통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지식이나 지혜 등 책으로부터 얻는 방대한 것들을 압축해서 머리에 모두 넣고 싶다는 생각까지 해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작가 보후밀 흐라발은 ‘체코 소설의 슬픈 왕’으로 불릴 정도로 사회낙오자, 주정뱅이, 가난한 예술가 등 주변부의 삶을 그려 냄으로써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을 주목하고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책을 고독의 피난처로 삼는 주인공 한탸의 독백을 통한, 책에 바치는 오마주다. 화자인 한탸는 책이 있기에 살 수 있는 사람이며, 그가 혼자인 건 생각들로 가득한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책이 그저 종이쪼가리로 취급받게 된 냉혹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화자의 정신 상태를 섬세한 문체로 그려 내고 있다.”(옮긴이의 글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고 있다. 폐지 압축공인 한탸는 더럽고 어두침침한 지하실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압축기와 맨손으로 겨루며 술에 젖어 사는 고독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시끄러운 기계음 속에서의 노동은 그가 압축한 책들처럼 찌든 삶으로 비춰지고 스스로 소외된 이방인으로 여겨진다. 작업을 하면서 어쩌다 읽게 된 책들. 그 안에 든 사고의 기름으로 날마다 영원한 야등을 밝힌다는 주인공은 독서가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노동과 인간 실존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 지상이 아닌 지하의 일터에서 시끄럽지만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려고 했던 주인공 한탸, 그가 바로 실존적 해방을 꿈꾼 작가 보후밀 흐라발이 아닐까.
---「책, 고독의 피신처」중에서
“왜 과거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물으면 저는 우리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겠습니다.”
_ 강영안의 『철학자의 신학수업』
C. S.루이스는 “오늘의 책을 한 권 읽으면 고전도 한 권 읽거나, 이렇게 할 수 없으면 오늘의 책 세 권을 읽으면 고전을 최소한 한 권 읽으면 좋겠다”고 했다. 저자는 “우리는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또한 타인과 함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과거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공유, 공감의 중요성으로 읽힌다. 자칫 ‘관념과 편견’ 속에 갇힐 수 있는 나의 사고를 빛의 세계로 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견과 관념은 동굴 속 어둠이다. 내가 세계의 전체인 듯 내 생각이 유일한 참인 듯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김영하의 산문 『읽다』에는 고전에 관한 공감할 수 있는 유의미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그와 반대로 처음 읽으면서도 어쩐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 고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동서양의 고전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고전들은 여러 통로를 통해 단편적으로 세상에 노출되곤 한다. 그런 것을 보고 듣는 데 익숙해져서 마치 자신이 언젠가 읽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든다. 알맹이가 없으면 소리만 요란하듯 사실 머릿속에는 고전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독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고 쌓여서 그 사람의 내공에 이르게 된다. 글을 쓰다 보면 늘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함을 느낀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소양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접한 것인지…. 그렇다고 늦은 나이에 매일 책과 씨름할 수는 없다. 문제는 필요한 정보를 나름대로 신속 정확하게 찾아내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찾아낸 정보를 어떻게 소화하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사용하느냐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능한 대로 고전을 가까이해야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 삶의 지혜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길잡이이기도 하니까. 고전이 시대를 초월하여 높이 평가되는 이유다.
---「왜 고전을 읽는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