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요, 사람보다 우리 집 월이가 훨씬 더 좋아요. 백만 배는 더 좋아요. 가끔씩 멍청한 짓 할 때면 국솥에 콱 넣어버리고 싶지만요. 적어도 우리 월이는요 지금껏 일편단심이에요. 나만 좋아해요. 어디로든 안 가요. 내가 걷어차도 밉다 소리쳐도 꼬리 흔들며 따라와요. 배신은 사람만 해요.” 그래서 사람이 싫어요.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요. 상처 입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를 사랑해버려 그 사람 기다리며 시들어가는 거 싫어요.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 나만 주며 아파하고 싶지 않아요. 만약 결혼을 한다면 마음 아프지 않을 만큼만 좋아하는 남자랑 하고 싶어요.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말들이 응어리진 채 목울대를 아프게 짓눌렀다. “수하야, 이수하 씨.” 허락 없이 남의 이름은 왜 불러. 나는 세다가 만 가로등 수를 다시 헤아렸다. 예전에 그가 말한 고대로 성의 없이 대답했다. “겁나게시리 그렇게 그윽하게 부르지 마세요. 황도규 씨가 내 이름을 불러주니 순진한 내 심장이 떨리네.” “나 좀 봐, 애기씨.” 나지막하고 부드러웠으나 이상하게 강요 같았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에 가려진 그 얼굴이 읽어낼 수 없는 깊은 비밀을 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걸까? 나는 도전적으로 그의 검은 눈을 마주 노려보았다. 서로에게 붙박여 움직이지 않는 응시(凝視). 달빛 아래 풀벌레 소리만 침묵 사이로 흘러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말하지 않는 말을 눈으로 주고받는 요상한 사이가 된 거냐? 하지만 애달피 가슴 설레며 내 마음 읽어주세요 하는 사이는 곧 죽어도 아니란 말이다. 이것 혹시 눈싸움을 하자는 거냐? 좋다, 나는 눈에 더 힘을 주었다. 그래서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억지로 꾹 참았다. 숙적 황똥규에게는 지지 않는다! 아얏! 나는 비명 질렀다. 피할 사이가 없었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말이다. 그 남자가 손을 내밀어 무례하게시리 내 콧등을 쥐고 아프게 비틀어놓는 게 아닌가. 이 남자 정말 짜증난다. 나는 신경질이 막 나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아얏, 아프다고요. 씨이, 왜 그래요?” “얄미워서. 어린 애기씨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단 말이지. 떽! 그럼 못써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잘못한 것도 없구만.” “배신은 사람만 한다는 거. 스물두 살 먹은 애기가 할 말은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이잖아요.” “더 살아봐요. 개도 배신하는 것을 보게 될 테니.” “진짜?” 그가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그 집 월이 나한테 보내봐. 두 달만 지나면 애기씨는 언제 보았냐는 듯이 모른 척하게 만들어줄 테니.” “쳇. 안 믿어. 우리 월이는 절대로 그런 개 아니라고요.” “아, 난 그렇게 만들 수 있어. 왠지 나에게는 개들을 홀리는 마력이 있나 보더라고. 나만 보면 어떤 개든 발라당 뒤집어져서 사랑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거 있지? 마성(魔性)의 애견인이라고 불러줘.” 그가 장담했다. 잘났어 정말. 황도규 씨가 다 비운 녹차 캔을 손아귀에 넣고 우그러뜨렸다. “사람이 배신하는 거 맞지만…… 있잖아. 애기씨 배신당한 마음을 만져주는 것도 역시 사람이더라. 그러니까 너무 사람을 미워하진 마. 당장 그 긴 머리 총각만 하더라도 은근히 좋아한다며? 마음에 든다며? 배신당할까 봐 미리 밀어내면 평생 좋아해서 기쁜 그 마음도 모를걸?” “어떤 기쁨도 슬픔을 당해내지는 못해요.” “기쁨이든 슬픔이든 둘 다 순간입니다. 애기씨. 슬플까 봐 기쁨을 피하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는 것 같아. 그건 맛없을까 봐 앞에 둔 음식을 안 먹겠다고 고집피우는 것하고 똑같다고.” “사람의 감정하고 음식이 어떻게 같아요?” “비유법 몰라?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난 먹고 나서 맛없다고 투덜대는 쪽을 택하겠다. 삶은 살아야 삶이지 피하는 게 아니거든. 아아, 이런 것도 아직 모른다니. 우리 애기씨를 언제 다 키우나.” 오늘만 해도 나를 키운다는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우씨, 내가 왜 황도규 씨 애기씨가 되는 거냐고요! 안 키워줘도 혼자 잘 크고 있거든요. 걱정 마시죠. 나요, 황도규 씨 만나기 전에도 스물두 해나 혼자 잘 자라고 있었다고요.” “잘 자라기는 개뿔! 내가 안 돌보았더니 이리 제멋대로 삐죽삐죽 슬프게 혼자만 아프면서 밉게 삐뚤게 자라고 있었으면서……. 늦었다. 가자.”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내 앞에서 그 문을 탁 닫아버렸다. 바깥에 선 나는 그를 노려보며 입을 삐죽였다. 듣고 있자니 참으로 가당찮구나. 우리가 뭔 사이라고 날 키운다 만다 하고 난리래? 내가 당신 딸이냐? 역시 황똥규는 만날수록 정말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이다. 이것 봐, 시계가 벌써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역시 오늘도 준영이나 서울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듣게 생겼다. 여하튼 내 인생에 전혀, 전혀 도움이 못 되는 인간이다. 우린 서로를 예전보다 삼십만 배쯤은 더 미워하면서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