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보가 한 궤를 가만히 열고 보니, 아, 쌀이 하나 수북이 들고, 또 한 궤를 딱 열고 보니, 거기는 그냥 돈이 하나 가뜩 들었는데, 궤 뚜껑 속에다가 ‘쌀은 평생을 두고 퍼내 먹어도 줄지 않는다’ 썼으며, 또 돈궤에도 ‘이 돈은 평생을 두고 꺼내서 써도 줄지 않는다’ 하거늘, 흥보가 좋아라고 궤 두 짝을 떨어 붓기 시작을 하는데. 흥보가 좋아라고, 흥보가 좋아라고, 궤 두 짝을 떨어 붓고 닫쳐 놨다 열고 보면 도로 하나 가득하고, 쌀과 돈을 떨어 붓고 닫쳐 놨다 열고 보면 도로 하나 가득하고, 툭툭 떨고 돌아섰다 돌아보면 도로 하나 가득하고, 떨어 붓고 나면 도로 수북, 떨어 붓고 나면 도로 가득.
“아이고, 좋아 죽겄다. 일 년 삼백육십 일을 그저 꾸역꾸역 나오느라!”
--- p.57
실건 실건 실건 실근 실근, 박이 활짝 벌어지니 뜻밖에 박통 속에서 노인 한 분 내닫는데 차린 복색 괴짜로구나. 다 떨어진 헌 베 바지 깊은 살이 다 보이고, 삼승 삼베 적삼 위에다 개가죽 묵은 배자 무릎까지 덜렁덜렁. 구멍 뺑뺑 중치막은 아랫단 황토 묻고, 떨어진 관에다 석 자 절반 되는 헌 베주머니 전 재산을 넣어 차고, 곱돌 깎아 만든 담뱃대 가운데 쥐고 놀보 놈 안방으로 제집같이 들오는데, 토깽이 얼굴에다가 빈대코가 맵시 있고, 뱁새눈 병치입에 목소리는 장히 크다. 두 눈을 부릅뜨고 놀보 놈을 바라보며,
“네 이놈, 놀보 놈아! 네 할애비 덜렁쇠, 네 할미 허천덱이, 네 아비 껄덕쇠, 네 어미 빨닥례가 모두 내 집 종일러니, 병자년 팔월 과거 보려고 서울 올라간 이후로 내 집 사랑이 비었을 제, 흉악한 네 아비 놈 가산 모두 도적하여 간 곳 모르게 된 뒤에 종적을 몰랐는데, 제비 편에 소식 듣고 천 리를 멀다 않고 예 왔노라. 네 가솔, 네 가산을 박통 속에다 급히 담아 내 집에 가서 시중들라.”
…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내어 주며,
“너야, 돈이든 곡식이든 뭘로 채우든지 이 주머니만 가득 채워 오너라.”
놀보 놈 속마음으로, 저 양반 저 억지에 많이 달라 하거든 이 일을 어찌할꼬 잔뜩 염려하였다가 주머니만 채워 오라니 얼마나 좋던지,
“하이고, 예. 예. 그리 하오리다.”
주머니를 들고 제 방으로 들어가 엽전 가뜩 담긴 주머니를 그 주머니에다 대고 조르르르르르 부어 놓으니, 놀보 돈주머니는 홀쭉하니 없어졌는데 생원님이 준 주머니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고 가뿐한지라. 놀보 어이없어,
“음마, 요런 잡것 좀 보소, 여.”
--- pp.95~97
흥부는 집도 없어 집을 지으려고 집 재목 할 모양으로 겹겹이 푸른 산 들어가서 작은 나무, 큰 나무를 와드렁퉁탕 베어다가 안방, 대청, 행랑, 몸채, 안팎 나누는 문, 문지방에 모양 살창 가로닫이 입 구口 자로 지은 것이 아니라, 이놈은 집 재목을 하려고 수수밭 틈으로 들어가서 수숫대 한 뭇을 베어다가 안방, 대청, 행랑, 몸채 두루 짚어 아주 작은 집을 꽉 짓고 돌아보니, 수숫대 반 뭇이 그저 남았구나. 방 안이 넓든지 말든지 두 부부 드러누워 기지개 켜면 발은 마당으로 가고, 대가리는 뒤꼍으로 맹자 아래 대문 하고 엉덩이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니 동리 사람이 출입하다가,
“이 엉덩이 불러들이소.”
하는 소리, 흥부 듣고 깜짝 놀라 대성통곡 운다.
--- p.120
한 왈짜가 내달아 하는 말이,
“그렇지 아니하다. 놀부 놈을 어서 내어 발기자.”
여러 왈짜 대답하되,
“우리가 말 주고받느라고 이때까지 두었지 벌써 찢을 놈이니라.”
악착이 내달아 하는 말이,
“그 말이 옳다.”
하고 놀부를 잡아들여 찢고 차고 굴리며, 주무르고 잡아 뜯고 주리 틀며, 회초리로 후리며 다리 가랑이를 호되게 틀며, 복숭아뼈를 두드리며 심지에 불을 붙여 켜서 발가락 사이를 단근질해 여러 가지 형벌로 쉴 사이 없이 갈라 틀어 가며 족치니, 놀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여러 해 묵은 똥을 싸고 세 치 네 치를 부르며 애걸하니 여러 왈짜 한 번씩 두드리고 분부하되,
“이놈 들으라. 우리가 금강산 구경 가다가 노자가 모자라니 돈 오천 냥만 내어 와야지,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면 목숨을 끊으리라.”
하니 놀부 오천 냥을 주니라.
--- pp.171~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