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소설가 여심(餘心) 주요섭(朱耀燮, 1902~1972) 탄생 120주기이고 서거 50주기였다. 주요섭은 1920년 1월 3일 『매일신보』에 처녀작 단편소설 「이미 떠난 어린 벗」 발표를 시작으로 1972년 타계할 때까지 50여 년간 단편소설 39여 편, 중편소설 6편, 그리고 장편소설 6편을 써냈다. 주요섭은 1934년부터 9년간 베이징의 푸런(輔仁)대학에서 영문학 교수, 1953년부터 1967년까지 14년간 경희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한 것 외에도 수많은 사회활동을 하였기에 전업작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발표한 작품 수를 볼 때 결코 적게 쓴 과작(寡作)의 작가는 아니었다. (중략)
주요섭은 흔히 말하는 ‘위대한’ 작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필수적인’ 작가이다. 적어도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해방공간과 6·25 전쟁을 겪은 그의 소설들은 한반도의 경제·문화·정치의 양상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 영국 작가 조지 오웰, 중국 작가 루쉰, 러시아의 톨스토이도 각 국가의 ‘필수적인 작가’들이다. 주요섭은 평양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고 중국 상하이에서 7년, 베이징에서 9년, 미국에서 최소 2년 반, 일본에서 수년간, 그 후 주로 서울에서 살았다. 20세기 초중반 기준으로 볼 때 소설가 주요섭은 한국 문학사 최초의 세계시민이었으며, 전 지구적 안목을 가지고 국제적 주제를 다룬 한국 문학에서 보기 드문 작가였다.
그동안 주요섭 소설들은 단편소설 위주로 소개되고 논의되었다. 지금까지 출간된 십수 종의 작품집들을 보면 주로 「인력거꾼」, 「사랑손님과 어머니」 등의 단편소설 위주로 중복 출판을 이어왔다. 중편소설 「미완성」과 「첫사랑 값」, 장편소설 『구름을 찾으려고』와 『길』은 출판되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단편들과 중편, 장편들은 거의 출판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주요섭의 소설 문학에 대한 전체적인 논의와 조망은 불가능하다. 편자는 수년 전 이러한 주요섭 소설 문학에 편향된 시각과 몰이해를 일부나마 교정하기 위해 주요섭 장편소설 4편을 모두 신문과 문예지에 연재되었던 원문과 일일이 대조하여 출간한 바 있다.
이번에는 단편소설 39편 전부와 중편소설 4편 전부를 가능한 한 원문 대조 과정을 거쳐 출판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명실공히 주요섭 소설 세계의 전모가 드러날 수 있게 된다. 뒤늦었지만 이제 일반 독자들은 물론 연구자들도 주요섭 문학에 대한 새로운 그리고 총체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책머리에」중에서
나는 단념하여야 한다. 나는 민족을 위해서는 독신생활?지라도 하기를 사양치 안튼 내가 안인가? 그런데 지금 이 ?은 무엇인가. 죠고만 게집애 하나에게 밋쳐서 공부도 학실히 못하는 이 ?은 무엇인가? 나는 대쟝부가 되여야 한다. 더욱이 N은 외국 녀자가 안인가? 련애에는 국경이 업다고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나 현금의 죠선 쳥년은 비상한 시기에 쳐하야 잇다. 비상한 시기에 쳐한 쳥년은 비상한 일을 하지 안으면 안이 된다. 목숨도 희생할 ?가 잇거든 하물며 사랑! 아! 그러나 가슴은 압흐다. 이것은 내 목숨갓치 귀한 내 첫사랑이 안인가! 그러나 용감하여라. 대장부답게 ? 단념해버려라. 아직 넘우 늣지 안타. 이 모양으로 지나가다가 넘우 느져지면 그 ?는 후회하여도 쓸데가 업는 것이다. 지금이 단념할 ?일다.
---「첫사랑 값」중에서
소나무와 구름 핀 하늘과 쑥밭과 딱딱거리며 날아다니는 메뚜기 ― 이런 모든 것이 새로운 아름다움, 새로운 뜻을 가지고 영순이의 마음을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주는 것이었다. 도랑도랑 흘러내리는 작은 시내가 얼마나 더 아름답게 보이고, 얼마나 더 신비스럽게 보이는가! 그녀는 그 시내 옆에 앉았다. 도랑도랑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금시 사람의 목소리로 변했다.
“아, 아름다움 인생이 어찌하여 아름다움을 못 찾고 헤매고 있읍니까? 그건 눈을 뜨고도 장님이 되었기 때문이요, 귀를 가지고도 귀머거리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산속 도랑물이 어쩌면 그이처럼 이런 말을 하면서 흘러내릴까?
“참된 화가는 참된 시인(詩人)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고 시내는 또 말하는 것이었다. 영순이는 시냇물을 말끄러미 들여다봤다. 이 물 흐르는 소리가 어쩌면 그이 목소리와 꼭 같고 또 그이가 하던 말을 신통히도 그대로 옮기고 있을까?
---「미완성」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