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력 24만 킬로, 예비율 0.35퍼센트입니다. 헤르츠 59.8, 마지막 순간입니다. 59헤르츠 밑으로 내려가면 계통 탈락 위기입니다.”
최철규의 목소리가 다시 침착해졌다.
“자, 시스템 수동으로 전환하고, 전력 부하 많은 순서대로 끈다. 실시!”
“여의도, 강남, 서초, 종로, 이런 데가 서울에서 지금 부하 높은 곳들입니다. 이 순서대로 다운 들어가면 되나요?”
최철규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도 최악의 상황을 결심한 것 같았다.
“들어가. 나중에 말 나오지 않게 전기 많이 쓰는 순서대로, 30분씩 정전! 순환정전 실시!”
거의 마지막 순간인데도, 실무자들 역시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냥 병원도 끄고, 군부대도 끕니까?”
“지금 우리 배전 시스템상, 건물별로 골라서 끌 수가 없어. 우리가 무슨 ‘스마트 그리드’야? 당장 통으로 내려. 지체하면 전체 다운이야. 내가 책임져. 실시!”
한국 근현대사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던 순환정전 지시가 그렇게 최철규 전력거래소 상황실장의 판단하에 진행되었다. 실무 오퍼레이터들이 지역별로 정전을 시키기 직전에 마지막 추가 지시가 내려졌다.
--- p.31
“정 본부장님, 이거 진짜로 하면 우린 다 잘려요. 말이 좋아 중부발전이지, 우린 그냥 한전 자회사, 따까리예요. 우리 회사 주주총회에 산업부 사무관 한 명, 한전 기획실장, 그렇게 달랑 두 명이 대주주 대표로 들어와요. 한전이 싫어할 일 했다가는, 그냥 아작나요. 우리 회사 최대 주주는 정부와 한전입니다. 만약에 이걸 한다면 진짜로 목 걸고 하는 건데, 서울시의 최종 목표가 뭐죠? 우리도 뭔지나 알고 목숨을 걸어야 할 거 아녜요.”
정성진이 최철규의 얼굴을 힐끗 봤다.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정성진은 크게 숨을 한 번 쉬고, 작은 보고서 하나를 흔들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태양광과 풍력과 같은 재생에너지로 자립할 수 있는 도시가 되는 게 서울시의 최종 목표입니다. 뭐, ‘지속가능한 도시’, 21세기 모든 도시의 꿈이겠죠. 거기까지 가기 전에 에너지 자립부터 하자, 이런 말입니다. 서울시 구청별로 하나씩 자기네 수요 감당할 수 있는 LNG 발전소를 만들면 전부 25개가 됩니다. 그 정도면 외부에서 전기 안 받고 자립할 수 있죠. 이 보고서 원저자가 바로 여러분들의 상사이신 한정건 처장입니다. 이거다 싶었습니다. 나중에는 이 LNG 발전소들을 관리할 서울시 자체 전력거래소도 만들고. 물론 이제 겨우 당인리와 목동 열병합 정도 확보한 거라서, 아직 기본 계획까지 논의할 단계는 아닙니다. 이 대리가 최종 목표 물어보시니까, 저희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 pp.93-94
“서울시 문제는 서울시 국감에서 따로 얘기할 테지만, 여기서 이건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전력 시스템이 불안하다느니, 블랙아웃이 와서 전국적 정전이 올 수도 있다, 이런 게 일상 생활하는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불안감이고 협박인지, 본부장 당신은 알 거 아냐?”
민기식의 발언이 이준원을 향했다. 그렇지만 피감기관 간부가 괜히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더더욱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준원은 버텼다. 민기식의 말은 점점 더 강해지고, 도끼처럼 공기를 갈랐다.
“본부장! 서울시장이 나중에 대통령 되면 청와대에 한자리 챙겨준다고 합디까? 공기업이면 공기업답게 품위와 공정성을 지켜야지, 어디서 대선판에나 기웃거리고 다녀? 이러라고 국민들이 당신들 연봉 챙겨주고 있는 건 줄 알아요?”
극심한 모멸감에도 사장은 호흡을 가다듬어보려 했지만, 되레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사고 발생부터 전계통 정전, 블랙아웃까지 대략 8초에서 20초 걸립니다. 그 순간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당연히 비상시의 컨틴전시 플랜을 마련하는 게 서울에 있는 전기 생산자가 국민 안전을 위해서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의원회관 내에서 독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 최세경이 책상을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외치기 시작했다.
“어이, 사장 양반. 그건 정부인 산업부, 국회의 우리 산업자원위원회가 할 일이야. 어서 한전 발전 자회사 따위가 끼어들어 국가 안전을 따져. 당신 돈 거 아냐? 이러니까 당신들이 정치권에 줄 대고 있는 거 아니냐고 지금 동료 의원들이 지적하는 거 아냐? 말 나온 김에 더 따져볼까? 당신들, 결국 LNG 쪽 사람들 아냐. 블랙아웃이니 태양광이니 분산형이니 어쩌구 하면서 원전이 위험할지도 몰라요, 이거 위험해요, 국민들 협박하는 거 아냐? 안전, 안전, 그러면서 결국 내셔널시큐러티, 바로 국가안보를 위험하게 만드는 거라고, 지금! 국민 안전? 웃기고 있네. 결국은 원전 없애고 자기들 자리 더 늘리겠다는 자리싸움 하는 거 아냐? 내 이 건, 한전 사장이랑 서울시장한테 꼭 따져 물어야겠어. 옛날 같았으면, 이건 한성판윤 역모야, 역모! 이것들이 아주 놀구 자빠졌어.”
--- pp.121-122
“세영 씨, 비상 상황인 것 같네요. 정전 끝날 때까지만 혜민이랑 엄마랑 현주 집으로 같이 데려가주세요. 혜민이가 어제오늘 좀 호흡이 안 좋기는 해요. 현주랑 저랑, 사무실 급히 가봐야 합니다. 진짜 큰 정전이면, 두 시간밖에 없어요. 혜민아, 엄마 간다. 삼촌이랑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아픈 데도 엄마와의 즐거운 일요일 외출을 즐기던 혜민이는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익숙한 일이라서, 속으로 눈물을 참았다. 그런 딸을 바라보던 정성진은 딸을 껴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자, 여기 현주 가방입니다. 식구들은 걱정 마세요, 제가 애들 잘 봅니다.”
세영이 황급히 현주의 옷이 들어 있는 스포츠 가방을 정성진에게 넘겨주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세영 씨.”
정성진은 가방을 받아들자마자 코트 위로 뛰어 올라가서 아직 지쳐 누워 있는 이현주를 일으켰다.
“비상이야, 사무실로 가자.”
“지진이었지, 금방?”
이현주가 일어나면서 묻자, 정성진이 가방을 건네면서 말했다.
“나주에 지진이 온 것 같아.”
“나주? 중앙급전소?”
--- pp.139-140
“괜찮을까요, 팀장님? 분명 뒤통수 맞을 텐데요.”
“알아, 그래도 방법 없지. 여러분, 계통부터 일단 살리고 봅시다. 자, 들어갑니다. 먼저 목동 구간부터 열겠습니다.”
이현주가 작은 무전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목동 나오세요. 지금 계통 들어갑니다. 송전 라인 개방하시기 바랍니다. 변압기 스위치 개방되었죠? 자, 우리 쪽도 통신망 열 준비하시고. 고!”
하누리가 당인 2호의 목동 쪽 표시판을 클릭했다. 목동에 불이 들어오면서 목동과 당인리 사이에 연결된 선들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전기와 통신, 모두 빛의 속도로 이동했다. 옆에 앉아 있는 신동호도 열심히 숫자를 살폈다. 숫자를 살펴보던 신동호가 말했다.
“헤르츠 59.98, 목동 체결 완료, 동조운전 정상.”
잠시 시스템을 살펴보던 하누리도 정상 상태를 확인했다.
“당인리-목동, 통신 정상 연결, 시스템 작동 시작했습니다.”
이현주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목동, 통신 라인도 연결되었습니다. 급전통신망 전화 갈 겁니다.”
이현주가 신동호에게 손짓을 했다. 신동호가 급전통신용 유선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는 당인리, 목동 들립니까?”
신동호가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냈다. 당인리와 목동 사이, 몇 개의 변압기를 거쳐 전기도 연결되었고, 통신망도 정상 연결되었다.
--- p.244
“이렇게 하자. 어차피 손보는 거, 차라리 당인 3호로 버전 업 해서 전국 버전으로 바로 가자. 운용 때는 다운그레이드해서 지역 버전으로, DB만 끼워 넣고 가게. 인천에 줄 때는 인천 모듈만 빼서 주면 되잖아? 분위기 보니까, 보령 본사 발전기들 살리려면 충남 버전도 결국에는 필요하게 될 거고. 그렇게 하나씩 만드는 거, 나는 그렇게는 못 한다. 여기도 손 보태 줄 사람 없는 건 똑같아. 그냥 통합 전국 버전 하나로 가자.”
“되면 그게 최고지만, 그게 돼요, 언니? 몇 시간 안 남았는데. 사실 그때 그 거지 같은 새끼들이 우리 팀 흔들지만 않았어도 벌써 다 되어 있을 텐데. 이게 뭐야?”
강선아의 입에서 가벼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옛날 얘기 해 뭐 해. 이현주, 이 언니를 믿어봐. 바닷물이 쫙 갈라지는, 홍해의 기적을 보여줄게. 지금 쓰는 당인 2호 풀버전, 프로코콜 당인 0호 관련 파일들, 싹 다 보내봐. 무서워서 외부에 공개를 안 했지, 기본 알고리즘은 그때 우리가 다 해봤잖아? 이 언니가 기적을 보여주지. 자, 또 연락!”
--- pp.26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