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가 있는 집 · 7
커피 얼룩 · 14 도망자 · 29 침수 · 74 햄릿의 그림자 · 103 좋은 표 · 127 불쌍한 토끼 · 146 편도 여행 · 194 농인 악마들 · 204 밀류틴스키 공원 · 255 최전방에서 · 327 훈장과 메달이 주렁주렁 달린 팬티 · 367 이마고 · 386 러시아 역사 · 439 엔데 구트(Ende gut) · 459 에필로그: 좋은 시절의 끝 · 501 작가의 말 · 522 옮긴이의 말 · 525 |
저류드밀라 울리츠카야
관심작가 알림신청Людмила Улицка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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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승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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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빅토르 율리예비치는 끝내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다. 어쩌면 책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 책이 공중에 흩어져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공기 중에 떠다니는 원고의 입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사가 있는 집」중에서 ‘선생님은 비운의 천재다. 미하는 재능이 없는 시인이고 이상주의자다. 사냐는 음악가가 되는 꿈을 못다 이룬 음악가다. 나는 밀고자가 되었다. 참 멋진 팀이군. 하긴,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이다. 나는 다만 이 모든 것이 보존되길 원할 뿐이다. 만약 과거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면, 아무도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끔찍한 페스트에 감염된 이 시기가 내 아카이브에 보존되는 것이다. 그럼 두려움은? 두려움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기사가 있는 집」중에서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젊은 어문학도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철의 장막에 균열이 생긴 것이었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문학의 모든 위계질서를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새로운 천체가 은하계에 등장했고, 연결된 모든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천체 전체의 메커니즘이 바로 눈앞에서 바뀌고, 문학작품의 절반이 자연 발화하여 재로 변해가는 기분이었다……. ---「커피 얼룩」중에서 비행기는 저주받은 삶의 폐허와 서로 끈적끈적하게 뒤얽힌 혼돈과 공포, 창피함과 거짓을 뒤로한 채 하늘로 상승해 열심히 서쪽으로 나아갔고, 그는 자유와 높은 고도의 공기, 그러니까 비행기 내부의 인공적인 공기를 흡입했다. 앞으로 놀랍도록 텅 빈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전에 잘못 쓴 것들을 모두 지우고 깨끗한 종이 위에 새로운 삶이 다시 쓰이기 시작할 터였다. ---「편도 여행」중에서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봉오리가 터지고 운명을 결정짓는 만남이 발생하며, 연락이 단절되었다가 경로가 바뀌고, 낮은 지대에 있던 삶이 고산지대로 올라가는 특별한 해 혹은 계절이 존재한다. ---「농인 악마들」중에서 그런 뒤에 그들은 미하의 집이 있는 치스토프루드니 가로수길에 와서 고모의 자매들이 가져가지 않은, 고모가 쓰던 낡은 물건들을 쓰레기장에 내다 버렸다. 그것은 누런 본드로 붙여놓은 접시들, 손잡이가 없는 낡은 냄비들, 텅 빈 립스틱 케이스, 오래된 신문, 걸레들, 낡은 옷가지, 절반만 남은 세라믹 곰, 노동절을 상징하는 깃발처럼 볼품없는 삶의 지루한 유해 같은 것들뿐이었다. ---「농인 악마들」중에서 “미하, 너 그거 알아?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은 다른 거야.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섞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사미즈다트를 한번 살펴보자고. 이건 현상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유례없는 일이야. 이것은 온천에서 또 다른 온천으로 전달되는 살아 숨 쉬는 에너지이고 사람들한테서 실이 나와서 거미줄 같은 것이 형성돼. 책과 잡지, 아주 옛날 시나 최근에 쓰인 시, 사미즈다트로 출간되는 정기간행물의 형태로 된 정보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통로 같은 거야.” ---「밀류틴스키 공원」중에서 식사 후 대화가 시작됐다. 대화는 묘하게 어긋났고 중간중간 끊겼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 혈통과 운명,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만든, 방금 일어난 이상한 일이라든지 천국에서 떨어진 듯한 아름다움에 대해 두서없이 대화를 나눴다……. ---「밀류틴스키 공원」중에서 “미하, 더는 이 세상에 새로운 소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구나. 내 남편을 감옥에 넣은 사람은 그의 친형제였어. 두 사람 모두 죽었지. 우리의 행동이 좋은지 나쁜지는 중요하지 않아. 결정은 운명이 하는 거야. 어서 먹으렴.” ---「최전방에서」중에서 “미하,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도 결국 죽을 거야. 그리고 음악과 시는 영원히 존재할 테고 말이야.” ---「최전방에서」중에서 사냐는 계속해서 바흐의 곡을 들었고 2주가 지날 즈음 병은 완전히 나았다. 마지막 전주곡과 푸가 나단조에 바흐는 이렇게 썼다. “엔데 구트, 알레스 구트(Ende Gut, Alles Gut).” * “좋군.” 사냐가 말했다. 그는 바흐의 말을 믿었다. ---「엔데 구트(Ende gut)」중에서 밖에는 눈도 비도 바람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바깥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발밑의 아스팔트, 건물 벽들, 나무줄기와 나뭇가지들, 이 모든 것에 얇은 얼음막이 덮여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에필로그: 좋은 시절의 끝」중에서 “리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말이 아니야. 물론 그 누구도 베토벤과 바흐를 대신할 수는 없어.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거지. 하지만 과거의 문화는 가고 새로운 문화가 도래했어. 요즘 문화는 패치워크 같고 이것저것 인용하기를 좋아하지.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도 과거와 다르고, 문화 전체가 하나의 완성된 공 같아. 과거의 문화 중 고루하지 않은 부분을 기반으로 두 번째 아방가르드가 시작된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혁신적인 것이 가장 빨리 낡더라고.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심지어 아방가르드를 변형한 시닛케까지도 고전이 됐지. 시간은 순환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흡수해. 그렇게 기존 것과 새로운 것의 경계가 무너지지. 유한하고 이미 폭로된 현상이라는 의미에서는 문화에 더는 어떤 진보도 없기 때문에 아방가르드도 더는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거야…….” ---「에필로그: 좋은 시절의 끝」중에서 |
험난한 시대에서 피어난 우정과 예술에 대한 탐구
소련의 역사적 변동과 개인의 삶을 엮어낸 작품 1950년대 모스크바, 어린 소년이었던 일리야, 미하, 사냐는 우연한 계기로 친구가 된다. 가정환경도 성향도 제각각인 세 사람은 문학 교사 빅토르 율리예비치의 가르침과 러시아 문학 애호가 모임인 ‘러문애’를 통해 견고한 우정을 쌓아간다. 우정의 중심에는 러시아 문학이 있다. 그들은 모스크바 곳곳을 산책하며 푸시킨, 마야콥스키, 톨스토이, 파스테르나크 등 앞서 험난한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와 혁명가들의 삶을 탐험한다. 그렇게 어느 시대든 인간은 시대적 어려움이 자신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애써왔음을 배우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수요일마다 빅토르 율리예비치는 러시아 문학을 사랑하는 친구들, 즉 자칭 ‘러문애’라는 동아리에 속한 아이들을 데리고 모스크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시절이자 아픈 시기를 통과하던 그들을 사상이 꿈틀대는 공간으로, 자유와 음악과 모든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데리고 다녔고, 그는 그 모임이 좋았다. 바로 여기서 그 모든 것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니, 바로 이 창문 너머에서! _1권 130쪽 학창 시절이 지나 각자의 삶을 구축하고 확장하며 여러 고난에 직면하는 동안, 세 사람의 운명은 상호 얽히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사리에 명석한 일리야는 지하출판물 사업에 뛰어들어 거처를 옮기며 살아가고, 이상주의자 미하는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들을 가르치다 금서를 유포한 행위로 쫓겨나며, 종국에는 강제 추방된 이민자들을 돕다가 위험에 처한다. 한편 사냐는 새로운 실험과 미지로 가득한 음악 이론과 악보의 세계에 매료된다. 이들은 정부 차원의 검열과 통제가 팽배한 분위기에서 도리어 예술적으로 활발하고 풍부한 시기를 살아가지만, 동시에 반유대주의와 같은 인간의 잔인하고 나약한 모습과 마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정을 통한 사회적 연결망은 “어른으로 위장한 사람들의 사회”에 잡아먹히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그 잡지를 계속 발행하지 말고 새로운 잡지를 만들어봐. 이름은 바꾸고. 뭔가 새로운 이름을 붙이면 재미있을 것 같아. 시는 네가 맡아. 나는 예술가들을 소개해줄게. 굉장히 멋진 예술 평론가를 알고 있어. 이건 새로운 아방가르드야. 내 친구 중에 훌륭한 친구들이 많아. 예술 잡지를 만들면 될 거야. 정치는 그 안에서 저절로 싹이 틀 거고.” _2권 311쪽 사라진 역사의 편린을 생생하게 복원한 한 시대의 진실한 기억의 악보 소설은 독재자 스탈린이 죽은 날에서 시작하여 망명 시인 브로드스키가 죽은 날에서 끝난다. 그 방대한 시간 폭 사이로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러시아를 관통하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시공간을 바꿔가며 전개되는 일화 하나하나는 세 명의 주인공과 반체제 지식인들의 삶뿐만 아니라 당시를 살아간 “삼류 단역 배우들”의 드라마 또한 생생히 담아낸다. 가령, 기존의 러시아 고전 문학에서 주변화된 여성 인물들의 서사는 이상화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채 소설의 한 축으로 존재한다. 또한 반정부 지하조직을 이끈 장군을 정신병자로 진단하길 강요받은 의사, 레닌에 관한 풍자화로 수배를 피해 도망친 시골에서 노파들을 그린 화가, 죽은 시인의 관을 만들기 위해 시신의 키를 재러 간 장례지도사, 부츠를 늘리려 금서를 찢어 넣은 소녀 등 역사와 허구를 절묘하게 섞은 인물과 사건들은 당시의 분위기를 몰입감 있게 재현한다. 거미줄처럼 비선형적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들은 역사적 진실이 음악 연주처럼 다양한 각도에 따라 계속해서 창조되며 변화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면 여러 겹으로 덧칠한 그림이 한 점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완성된 그림은 묘하게 아름다웠다. 이제 그는 자기가 사라져가는 세계를 그리는 학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파들은 자기들이 지어낸 이야기를 하며 웃었고 그럴 때면 주름살 가득한 얼굴 표정이 밝아졌는데 그럴 때 보리스 이바노비치는 식탁 앞에 앉아서 그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_2권 58쪽 『커다란 초록 천막』에 관한 한 인터뷰에서 울리츠카야는 이 소설을 통해 당시 젊은 세대의 공통된 편린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거대 담론을 취하는 역사는 권력을 따랐던 자와 그를 거스르고 살아간 자를 분류해서 기억하지만, 소설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사람들의 삶에 벌어지는 우연한 사건과 작고 큰 결정들이 역사의 한순간을 이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또한 복잡한 심리보다는 사랑, 고통, 죽음, 두려움과 같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공명하는 감정들로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써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이때 작가는 심판자의 자리에 있기보다 그 시대를 몸소 살아간 증인의 입장에 서서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따라서 인물들은 시대의 무게에 억눌려 위축되기보다, 나약하지만 각자의 꿈과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렇듯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커다란 초록 천막』은 한 시대에 대한 독특하고 생동감 넘치는 악보가 된다. 추천의 말 1950년대부터 소련 해체까지의 러시아를 아우르는 이 반목의 서사시는 고전 러시아 소설에 대한 독자의 기대를 대담하게 뒤집는다. _〈뉴요커〉 거대한 야망을 품은 걸작. 가장 사소한 것에도 매혹적인 생명력을 부여하여 생생하게 살아 숨 쉬게 한다. _〈NPR〉 “웅장하고 견고한 나무처럼 모든 것을 아우르는 소설. 21세기 러시아의 가장 저명한 작가인 울리츠카야는 삶의 기쁨, 비애, 위험을 완벽하게 그려낸다. (……) 『닥터 지바고』와 함께 책장에 둘 만한 가치를 지닌 감동적인 작품. _〈뉴욕타임스〉 |
작가는 왜 쓰는가. 파스테르나크는 동시대인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쓴다고 말했다. 혁명의 격동기를 다룬 『닥터 지바고』가 바로 동시대인들에게 바친 헌사였다. 이 헌사의 대열에 『커다란 초록 천막』을 더하고 싶다. 파스테르나크의 바통을 이어받아 울리츠카야는 자기 세대의 삶과 고난의 역사에 대한 면밀하고 감동적인 서사를 완성했다. 이로써 한 세대의 삶이 비로소 온전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울리츠카야는 문학이 여전히 한 시대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위대한 천막’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 이현우 (로쟈/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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