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새로움에 매료될 태세가 되어 있는지요? 죽음을 통과한 새로움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경이로움을 체험합니다. 경이로움은 사람의 영을 새롭게 하여 낡은 사람도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줍니다. 경이로움은 사람을 변질시키지 않고 변모시킵니다. 새로움은 아주 강력하나 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답게 이끌어줍니다. 그동안 자신으로 살 수 없게 방해하던 낡은 요소를 무너뜨립니다.
---「새로운 것 앞에」중에서
어쩌면 역사 속 유다는 누구보다 예수를 열정적으로 사랑했을지 모릅니다. 사랑을 쏟았던 만큼 그 사랑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대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열혈당원 유다에게 그 사랑은 자기와 같은 길, 조국의 회복이라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민중선동, 민중의 신뢰확보, 로마에 대한 복수심, 유대인의 희망인 메시아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이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시간을 유다는 견딜 만큼 견뎠을 것입니다. 이 열혈당원에게서 빠질 수 없는 애국심과 자기욕망 또한 모자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주머니 역할을 맡았던 것을 보면 누구보다 현실에 밝고 또 총명했을 것이고, 그 총명함으로 누구보다 빨리 자신의 길과는 너무도 다른 예수의 길을 파악했겠지요.
---「한 유대인의 초상화, 예수와 유다」중에서
인간의 고귀함이 자연 위에 우뚝 서서 마음대로 통치하고 지배하는 것일까요? 생명의 소중함이 과학의 발전만으로 지켜낼 수 있을까요? 인간의 참 행복이 물질이 풍족하다 하여 얻어지는가요? 참된 자유가 우주를 여행한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 없는 이성,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발전의 끝이 이제는 보이지 않나요? 이제 우리는 사막의 수도자들처럼 “우리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을 때가 되지 않았는지요? 역설적인 의미에서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제목은 잘맞는 듯합니다.
---「방랑자라기보다는 마치 모든 것의 주인인 양」중에서
약한 인간들이 모여 살아가는, 상처가 없을 수 없는 가정과 공동체를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자기희생의 사랑입니다. 화해할 수 없는 마음의 수백 겹의 단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도 이 자기희생의 사랑뿐입니다. 사랑을 가장한 왜곡과 집착의 어지러운 실타래 안에서도 고요히 사랑의 숨을 내쉴 수 있게 해주며, 손쉽게 실타래를 끊어버리고 해방을 외치게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서로가 더 힘들어져도 화해의 여정 없이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빈자리입니다.
---「빈자리, 하지만 따뜻함으로 채워지는」중에서
나무는 가을이 되면 잎을 떨구어야 생명을 키워갈 수 있고, 낡은 세포가 죽어야 새 세포가 생겨나듯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법칙임을 깨달을 때 나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모두를 향한 것임을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게 됩니다. 이렇게 얻게 된 생명은 하늘 생명에 근거를 둔 새생명입니다. 죽음을 거친 생명은 죽음도 침범하지 못하는 생명, 이미지상에서도 하늘 아버지의 생명, 내어주는 생명을 살아갑니다.
---「내어주는 생명」중에서
카라바조의 표정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자신의 한없는 약함과 그 약함을 끝까지 탓하지 않는 하느님의 감당키 어려운 무한한 사랑이 자신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보고 그 앞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그런 표정으로 읽힙니다. 약하기에, 진짜 죄를 지었기에 닿을 수 있었던 그 밑바닥, 도저히 하느님이 머물 것 같지 않은 그 인간의 바닥에서의 남루함을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 카라바조의 눈속에는 하느님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약함은 하느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초상화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된 그의 약함」중에서
정말 다른 엄마의 모습, 이런저런 약함도 생생히 느껴지는모습에서 오히려 살아 있는 엄마들이 다가옵니다. 엄마 없는 존재는 세상에 없어 자신의 뿌리를 보고자 한 화가들의 공통된 마음 같은 것이 전달됩니다. 그림 가운데 엄마를 미화하거나 찬양할 목적으로 그린 듯한 그림이 하나도 없다는 데서 이런 생각이 절로 들지요.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자신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어머니의 모습에 새겨진 화가들의 작품세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