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해를 통해서 요즘을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젊은 여성을 그려보고 싶었다... 남 앞에 나서거나 튀고 싶어하지 않는 여자들, 집에 돌아와 책을 읽기보다는 토크쇼를 보고 잠이 드는 여자들, 직장에 다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게 지상목표인 여자들, 그저 낭만적인 가정의 행복을 막연히 꿈꾸는 여자들 말이다...'
--- <수상작가 인터뷰 중에서>
아홉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전화벨은 울리지 않는다. 윤자는 저녁상을 차린다. 식어버린 두루치기에 약간의 물과 고춧가루, 햄을 볶고 남은 파를 넣고 가스불을 강하게 조절한다. 두루치기는 금세 보글보글 졸아든다. 문득, 양념에 재운 돼지갈비를 팔고 있던 중년 여자가 집으로 돌아가 고단한 몸으로 저녁상을 받았을까 생각해본다. 여자는 고기 반찬에 입을 대지 않을 것이다. 파의 강한 휘발성 향이 기분 좋게 코끝에 감기며 식욕을 돋운다. 윤자는 두루치기와 햄야채볶음으로 밥 한 공기를 깨끗이 비운다. 식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올리브유에 볶은 햄과 야채는 아주 맛이 좋다. 올리브유는 식용유보다 세 배쯤 비싸다. 윤자는 계란 프라이도 올리브유에 부쳐볼 생각을 한다.
--- p.40
비브르 사 비>라는 영화를 보았죠.흑백의 고다르. 난 영화 속 그녀처럼 머리칼을 자르고 싶어졌어요. 그녀의 이름은 나나, 스물두 살. 난 책임에 대해 생각해. 담배 피우는 건 내 자유, 내 책임. 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도 자유, 내 책임.눈을 감는 것도 내 자유, 내 책임. 책임을 잊고 있을 때도 책임은 남아있으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도망치고 싶다는 거야. 그녀의 이름은 나나.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그녀, 특별해 지고 싶은 그녀, 포주에게 편지를 쓰는 그녀.
말하지 않고 산다는 건 멋진 일일 거예요. 책 읽어주는 남자, 다시 사랑해게 된 그녀. 룩셈부르크 공원에 가고 싶었던 그녀, 갈 수도 있었던 그녀.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말은 안 돼, 쏘지 마... 삶을 생각한 순간 죽음이 시작된다는 걸 쓸쓸하게 쓸쓸하게 보여주는 고다르. 그녀는 충분히 특별할 수 있었는데 말이죠
--- pp. 131~132
별똥은 아무래도 좋았다. 윤자와 은혜는 북두십성을 찾고 있었다. 제각각 딸애가 찾으려 했던, 엄마가 찾으려 했던 북두칠성 - 그 열 개의 별을 찾고 있었다. 어느 별자리는 종종 보이지 않는 작은 별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것은 하나일 수도, 둘일 수도, 셋일 수도, 얼마든지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그토록 즐겁고 쓸쓸한 경우의 수. 그러나 윤자와 은해는 서로가 밤하늘의 어느 언저리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연못가의 소년들이 컵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라면을 한 젓가락 후루룩거리고는 김치를 집는 대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빌고 싶은 소원이 많을 나이다. 별똥비를 기대하며 가져온 노란 우산, 아직 우산을 접지 않았다. 윤자와 은해는 아프게 고개를 젖히는 대신, 분주하고 소란수러운 세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세 개의 별을 들여다보듯.
--- p.188
다시 오늘 아침, 남편과 아들애가 남긴 밥으로 식사를 한 윤자는 느릿느릿 움직였다. 느릿느릿 더운물을 틀어 설거지를 하고 느릿느릿 빨랫감을 찾아 세탁기를 돌렸다. 청소는 하지 않았다.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내일이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윤자는 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 타 들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다. 신도시 아파트엔 위성 방송과 케이블 채널을 시청할 수 있는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 시간 남짓 티브이 화면을 쳐다보았다. 오 분에 한 번쯤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바꾸었다. 티브이를 시청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윤자는 채널이 몇 개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 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