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석굴암과 불국사가 조성되어 신라 전성기처럼 보이는 경덕왕 때는 왕의 음경이 엄청 큰 시대였다.
“왕의 음경이 여덟 치였다.”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조목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아무리 일화와 설화 글쓰기를 주로 하는 《삼국유사》이지만, 한 왕의 성기 크기가 얼마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서이다. 자를 가지고 그것을 직접 쟀을 리는 없고, 왕의 그것이 크다는 것을 실감 나게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여덟 치라면, 어른 팔뚝만 하니 크기는 크다. 그런데 왕의 거시기가 큰 게 무슨 역사거리란 말인가? 《삼국유사》 ‘경덕왕’ 조목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런 말을 한 까닭이 어느 정도 짚인다. 경덕왕의 음경은 여덟 치나 되었다는 말 앞뒤에 두 이야기가 있는데, 둘은 서로 완전히 어긋나 있다. (24쪽)
충담과 표훈은 너무도 달랐다. 왕사王師라는 자리를 물리친 스님과 왕의 터무니없는 욕망을 고분고분 받든 사람으로 그 둘은 갈렸다. 그래서 일연 스님은 두 사람을 각각 ‘경덕왕’ 조목의 앞 이야기와 뒷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았으리라. 경덕왕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하였지만, 무엇을 위해 그 일을 했는지를 충담사는 알고 있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전제 군주를 추구하는 경덕왕의 뜻을 잘 반영하는 취지에서 김대성에 의해 조성”되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표훈은 왕의 부질없는 욕망을 위해 그의 손발이 되었다.(38쪽)…중략…
이게 무슨 소린가? 대공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과 5도道 주군州郡에 속한 96명의 각간이 서로 싸웠다고 하니, 전국적으로 일어난 내란 상태를 그렇게 말했으리라. 각간은 신라 17등위 중 제1등위이니, 96명의 각간이면 당시 신라 각간 대부분이 이 내란에 얽혀 있었다고 하겠다. 내란의 결과, “난리로 말미암아 상을 받은 사람도 많았지만 죽임을 당한 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몇몇 사람의 권력욕 때문에 생긴 난리 통에, 파리 목숨처럼 스러져간 사람들의 무수한 목숨이 신라 조정에 나뒹군 것이다.
이에 일연은 못을 박았다.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말한 게 바로 이것이다.” 경덕왕 때 뿌려진 씨앗이 혜공왕 때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이렇게 또렷이 하였다. 반란은 이 한번이 아니었으니, 혜공왕이 왕위에 있던 16년 동안 다섯 번이나 일어났고 마지막에는 그 자신이 살해당했다.(43쪽)
경덕왕의 큰 음경이 퍼뜨린 씨앗은 이제 다 거두어졌는가? 혜공왕이 시해를 당한 것으로도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서로 왕이 되겠다고 찌르고 찔리는 신라 하대의 시작이다. 하지만 경덕왕의 큰 음경이 저지른 죄악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꾼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절망을 들려준다.
“표훈 이후로는 신라에 거룩한 인간(聖人)이 나지 않았다고들 말한다.”
하느님이 표훈에게 다시는 하늘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더는 거룩한 사람이 이 땅 신라에서 생겨날 수 없음을 두고 한 말씀이었다.(44쪽)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는 경덕왕보다 표훈에게 더 뼈아픈 소리임을 알겠다. 이야기를 찬찬히 되씹어보니, 이야기꾼이 표훈을 아주 매섭게 몰아붙이는 게 느껴진다. 표훈은 스님도 아니고 대덕大德도 아니다. 이게 이야기꾼이 그에게 내린 판때림이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 내내 ‘표훈, 표훈’할 뿐, 표훈스님이니 표훈대덕이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덕왕이 표훈을 대덕이라 불러도, 이야기꾼은 표훈을 그렇게 부를 수 없어서였던 것이다.(45쪽)
2. 전쟁을 잘해 땅을 넓힌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진흥왕’ 조목은 정말이지 당혹스럽다. 이 왕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일연이 뽑은 것은 법흥왕의 딸인 어머니에 의한 섭정, 함께 고구려를 치자는 백제의 제안을 거부했다가 백제의 침략을 받아 3만 9천 명이나 되는 백성을 포로로 만든 일, 죽을 때 머리 깎고 승복을 입은 일, 이것이 전부다.
진흥왕을 알려주는 것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장면이 아니라 맥없이 나가떨어진 장면을 일연은 치켜든 것이다. 이 전쟁 장면을 뽑아, 이렇게 진흥왕을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193쪽)…중략…
땅을 넓히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겼다면 일연은 틀림없이 진흥왕 조목을 그런 것으로 채웠을 것이다. 부처의 자식이기에 그의 눈에 그런 것들은 ‘인간세의 비극’일 뿐, 조그마한 자랑거리도 못 되었다. 더군다나 몽골로부터 침략을 당해 처참해진 때를 그 자신이 살고 있었기에, 눈만 뜨면 전쟁이 가지는 악마성이 보였을 것이다.(195쪽)
3. 지증왕의 음경에 맞는 짝이 모량부 상공의 딸인 까닭
지증왕의 음경이 하도 커서 짝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64세에 왕의 자리에 올랐고 일은 그 뒤에 일어난 것이니, 파파 할아버지의 거시기에 맞는 여인네를 주변에선 찾을 수 없어 그것에 맞는 짝을 찾아 나섰단다. 영 수상쩍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때까지 그는 노총각으로 늙다가 왕이 된 뒤에야 짝을 찾는 셈이 된다.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예순하고도 넷이나 되어 이미 할아버지가 된 왕의 짝찾기는 문학적인 언어로 읽어야 하리라. 그의 음경이 엄청 컸다는 소리는 그의 권력욕이 엄청났다는 소리이다. 그래서 《삼국사기》는 그를 “체격이 크고 담력이 월등하였다”라고 하였으리라. 뭔가 깜짝 놀랄 정도로 담력이 큰일을 했음이 틀림없다. 비처왕을 몰아낸 것을 두고 한 소리일까?
담력이 크고 거시기도 큰 지증왕이 찾은 짝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었다. 북만큼 큰 똥을 눈 여인이었다. 아무나 그렇게 큰 똥을 눌 순 없다. 그녀가 그렇게 큰 똥을 눌 수 있었던 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모량부 상공이 누구인가? 그는 박혁거세를 시조로 둔 박씨 씨족의 대표이다. (……) 이런 그에게 그의 큰 음경을 받아줄 집단으로 보인 게 박씨였다. 결국 이 이야기는 내물왕의 방계인 지증왕과 박씨의 정치적 연합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연합은 최소한 80년 이상 이어졌다. 지증왕 이후 법흥왕, 진흥왕을 거쳐 진지왕에 이르기까지 왕비는 내리 박씨의 몫이었다. 그런데 두 집안을 묶어주는 것은 정치적인 권력, 그것 만이었을까?(175~177쪽)
4. 정치란 이런 것이다.
우연일까? 신라 천 년의 절정인 성덕왕 때, 세계 평화를 알리는 만파식적을 형상화한 종이 이 땅에 나타난 게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일연이 본 성덕왕 시절이 어떠했는가를 알아보자.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신룡神龍 2년 병오년(706)에 흉년이 들어 인민人民이 몹시 굶주렸다. 나라에서는 백성을 구제하고자 정미년(707)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까지 벼를 나누어주었는데, 한 사람당 하루 석 되를 기준으로 했다. 일을 마치고 합계를 내보니 30만 500석이었다. 왕이 태종대왕을 위해 봉덕사를 세우고 이레 동안 인왕도량仁王道場을 베풀며 대사면을 하고 처음으로 시중侍中이라는 관직을 두었다.
이것이 ‘성덕왕’ 조목의 전부다. 신라 최전성기를 성덕왕 시절로 꼽는 역사학자들이 많은데, 그 시절을 알리는 일연의 붓은 너무 단출하다. 게다가 거룩한 덕이 있는 임금(聖德)이라는 시호에 어울리지 않게 심한 흉년이 그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다.
자연재해, 흉년은 대개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재앙이다. 하지만 그것의 최종적인 결과까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문화와 문명의 힘, 즉 ‘정치에서의 거룩함’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가 오히려 거룩함이 나타날 기회인 것이다. 민중을 궁핍에서 구제하여 참된 사람으로 나아갈 터를 닦는 것이 아니라면, 정치에서 거룩함이 나타날 자리가 어디이겠는가?
민중이 곤궁에 처했을 때, 그것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면 그가 어떤 정치인인지 알 수 있다. 흉년이 들자, 성덕왕은 50보 도망간 자가 100보 도망간 자를 비웃는 짓일랑 하지 않았다. 맹자는 민중이 고통받을 때 위로하는 ‘체’하거나 사탕발림으로 찔끔 베푸는 것은 50보 도망간 자가 100보 도망간 자를 비웃는 짓이라고 했다.(284~284쪽)
5. 신라 1000년이 키워낸 사람
천 길이나 솟구친 자줏빛 바위, 그 꼭대기에 붉은 진달래가 피어 있다.
아름다움의 극치고, 거룩함의 극치다. 사람이 밟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은 그래서 나옴직하다. 하지만 물길 여인(水路夫人)은 거룩함의 극치에서 피어오른 아름다움을 짐짓 못 본 체하고 살아갈 수 없어, ‘그 사람 누군가?!’를 늘 외었다.
새끼 밴 암소를 끌던 사람의 귀에 간절함이 들어왔다. 그는 소고삐 잡은 손, 진리(진리 찾는 것을 불교에선 소 찾는 것으로 말한다)를 붙잡고 놓지 못한 채 오히려 거기에 매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천 길 바위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 세상 꼭대기에서 피어오른 꽃을 꺾어 한 여인에게 바쳤다. 그러곤 떠나갔다.
그런데 난데없는 말이 있다. “그는 사람에게 허용된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게 무슨 소릴까? 이것을 빨리 밝히고 싶어서인지, 일연은 노옹이 꽃과 함께 바친 헌화가獻花歌가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조차 미루고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288~289쪽)
이제 그녀에겐 다른 사람에게선 나지 않는, 아니 이전의 그녀 자신에게서조차 나지 않았던 향내가 풍겼다. 천 길이나 솟구쳐 하늘 닿은 곳에서 핀 꽃을 품고, 또한 깊이깊이 들어가 드디어 용궁에까지 가, 용궁 음식을 먹고 온 여인, 그런 여인에게서 배어나오는 향기였다. 시대와 시간을 뛰어넘는 맵시였고 낯빛이었다. 한 나라를 기울였다 올렸다 한다는 경국傾國의 아름다움에 빗댈 바가 아니었다. 산천 계곡에 노닐며 이 세상 것이라곤 거들떠도 보지 않던 신령한 존재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아름다움이었다. 소리로써 세상을 이화하는 만파식적을 이루어냈던 성덕왕 때, 그리하여 거룩함과 아름다움의 높이와 깊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던 성덕왕 때, 그에 걸맞은 이야기가 수로부인 이야기다. 그러니 그런 때가 아니면 생겨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291쪽)
6. 누가 단군의 후손인가?
단군은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식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나간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단군에게 자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 단군사화史話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단군의 후손이라는 이 땅의 사람들은 다 누구란 말인가? 단군사화가 사실이든 허구든 거기엔 핏줄은 나오지도 않는데, 어디서 그 많은 자손이 솟구쳤단 말인가? 이것을 풀기 위해선 단군사화를 다시 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94쪽)
왜 하필 쑥이고 마늘일까? 우선 살덩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이상적인 의미에서 사람과 짐승은 잔인함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갈리기 때문이다. “저 짐승 같은 놈!”이라는 말이 ‘잔인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데서 그것은 입증된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덩이를 베어 물면서도 짐승, 즉 곰과 호랑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영 말발이 서지 않는다. 마약을 끊듯, 남의 살 먹기를 끊어야 짐승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슴 뛰는 이 일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려면 이 일을 촉진하고 이끌어내는 ‘나라’가 세워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이 일은 해프닝이 아니라 역사가 될 것이다. 널리 복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홍익인간의 나라, 그래서 세상 구석구석이 이치에 딱 들어맞음을 드러내는 재세이화의 나라, 이 어기찬 뜻을 품고 단군왕검은 드디어 생명이 약동하는 아침의 나라 조선을 이 땅에 세웠다.(106쪽)
단군사화는 《삼국유사》의 머리에 놓여 있다. 단지 중국을 의식하고 이 이야기를 내세운 게 아니다. 우리 민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북극성이라 여겨 그리한 것이다. 그러니 일연에게 이 사화의 이념인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이 눈으로, 그는 신라의 역사를 되잡아보았다.(109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