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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릴 적에

나 어릴 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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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291g | 148*225mm
ISBN13 9791186418987
ISBN10 1186418982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먼, 아주 먼 곳을 홀로 여행할 때 모든 풍경은 낯설다. 그곳을 비추는 태양도 그렇고 바람도 내겐 이방인이다.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아름답지만 외로워 보이고 거기에 더해 날씨라도 쌀쌀하다면 달빛은 상심한 외로운 나그네의 마음이다. 아무도 없는 바람 부는 언덕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는 순간 하늘에 떠 있는 한 마리 매를 보게 된다면 그 모습이 고독하다고 느끼면서도 어딘가에서 매의 표적이 된 어린 짐승의 서글픈 마지막이 서럽다.

먼 길을 돌아 내가 평생을 동경하던 나만의 고향에 지친 몸으로 다다랐을 때 나를 반겨줄 이들은 누구일까. 이젠 소식조차 닿지 않는 동네의 친구들이며 이웃했던 어른들과 형과 누나들, 동생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주름져 늙어버린 얼굴이라도 마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바람도 세월은 야속하게 등을 돌린다.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어린 날의 기억들은 옛날이 그리워 자꾸만 울컥거린다.

(…중략…)

내가 살던 동네는 제법 큰 도시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이었는데 그러면서 바다를 끼고 발달된 제법 큰 항구도시의 변두리였다. 60년대의 흙 색깔 짙던 그곳도 예외는 아니었던 터라 어디를 가든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냄새는 내 몸 냄새처럼 익숙했다. 동네에서 오 리 정도만 걸어가면 염전이 바둑판처럼 끝없이 늘어서 있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요즘의 아토피쯤으로 생각되는, 당시에는 원인 모를 피부병 때문에 온 몸이 가려워 긁으면 피가 맺힐 정도의 부실한 몸을 가졌던 내겐 그 염전이 소중한 치료 처였다.

당시 미군부대의 꽤 직급이 높은 군속으로 근무하셨던 아버지는 퇴근 하신 후 일주일에 두 어 번은 염전의 바닷물을 길어 오셨다.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 덥힌 다음 그 물에 나의 몸을 닦아주셨다. 여름날의 휴일이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염전으로 가서 수로의 깊은 물에서 나를 등에 업고 수영을 하시며 내 몸에 바닷물을 적셔 주셨다. 아버지의 등에 업힌 채 혹시라도 바닷물에 빠질까봐 조마조마 할 때면 황해도 옹진 바닷가가 고향이신 아버지는 능숙한 솜씨로 수영을 하시며
“걱정마라, 안 빠진다.”
라고 늘 말씀하셨다.

젖은 몸에 그대로 옷을 입은 채 아버지 등에 업혀 반쯤 감긴 눈으로 집에 돌아오면 소금기 하얗게 일어난 내 몸을 만지시며 어머니는 언제나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셨다. 결국 온갖 민간요법과 병원치료를 동원해도 낫지 않는 나의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어머니는 큰 결심을 하셨다.

내 위로 두 명의 형과 아래로는 갓 젖을 뗀 동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데리고 온천으로 치료여행을 떠나셨다. 지금도 어렴풋한 기억으로 초가집에 호호백발 할머니께서 요즘으로 치면 민박집쯤 되는 곳을 운영하셨고 어머니와 나는 그 집에서 일주일동안 먹고 자며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온천욕울 했다. 지금이야 시설 좋은 커다란 온천욕장이 많이 있지만 예전에는 몸을 담글 수 있는 탕조차 없이 그저 물을 떠서 몸에 뿌리는 정도의 작은 온천탕들만 있었다. 일주일이 다 되어 떠나기 전에 할머니께서는 돼지고기를 넣은 찌개를 끓여 밥상에 올려 주시며
“이젠 고기 먹어도 괜찮다.”
고 하셨다.

그 후론 거짓말같이 어린 몸을 괴롭히던 피부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어머니의 품에 기대어 오며 언 듯 언 듯 보았던 저 멀리 산들의 모습은 모두가 민둥산들이라서 지금 이 나이에 바라보는 나무 빼곡한 주변의 산들을 보면 그때의 헐벗었던 산들이 오히려 정겨웠었다고 생각 되는 것은 무슨 일일까. 그야말로 5, 60년대는 산도 헐벗고 사람들도 헐벗어 가난이 일상의 전부였던 시대였는데 그 와중에 온천여행을 갔었던 형편으로 보면 우리 집은 살만했던 것 같다.

(…중략…)

우리 식구가 도시의 중심부쯤에 살다가 외곽으로 이사 온 관계로 형들은 시내의 학교를 다녔고 나는 집 근처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하교 후 집에 오면 대문에 앉아 형이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다. 저 멀리 나타난 둘째 형은 오로지 땅만 쳐다보며 걸어왔다. 학교 앞에서 눈에 띈 모양 좋은 동그란 돌을 십 여리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돌을 발로 차며 가지고 온 것이다. 상가도 지나고 도로도 건넜을 텐데 그 대단한 집중력은 둘째 형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봄에 추호의 망설임도 들지 않게 했다.

집에 도착한 즉시 그 돌을 담벼락 위 벽돌 틈에 죽 끼워 놓은 다음 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내 손을 잡고 동네 야산으로 올라간다. 그곳에는 둘째 형과 또래들의 아지트가 있어서 그들이 아니면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아카시아 나무가 제법 무성한 곳에 자연적으로 생긴 별로 깊지 않은 동굴을 둘째 형과 또래들은 삽이며 곡괭이를 동원하여 꽤 넓은 크기로 넓혔고 그 안에는 자신들의 나무칼과 활 등을 걸어놓고 거의 매일 그곳에 모여 전쟁놀이를 했다.

나는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처지라 그 멤버에 낄 수 없었지만 그 무리의 골목대장이었던 둘째 형의 배려로 형들과 같이 놀 수 있었다. 우리 형이 골목대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아버지 덕분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형은 결단코 자신의 싸움 실력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 나무칼을 만들 때 대부분의 동네 아이들은 어렵사리 구한 막대기를 다듬어 만들었는데 이미 건축의 자재 등으로 오랜 시간 지난 것들이라서 약해도 너무 약했다. 하지만 둘째 형의 나무칼은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미군부대의 목공소에서 만들어진 단단해도 너무 단단한 박달나무로 만들어진 신검이었다. 그러니 싸움을 하면 상대방의 칼은 몇 합을 넘기지 못하고 대부분 부러졌다. 칼싸움에 칼이 동강나면 죽은 목숨 아닌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들어맞듯이 형은 호리호리한 몸매에도 언제나 위풍당당했다. 언젠가 대보름날 전쯤으로 기억되는 때였는데 형의 친구이자 부하였고 그 중에도 머리가 제법 똑똑했던 철민이 형이
“대장, 저 윗동네 피난민촌 애들이 한 판 붙자는데?”
“건방진 녀석들, 감히 우리에게 덤비겠다고? 그래, 좋다. 보름 전날로 한다고 알려줘라.”

둘째 형과 친구들, 그리고 나는 며칠 동안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면서 쓸 만한 돌을 모으기 시작했다. 손 안에 착 들어오고 던지기도 편한 가능한 한 둥글고 단단한 돌이어야 했다. 투석전에 사용할 실탄은 그렇게 모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둘째 형의 평소 준비성에 대해서 감탄을 마지않았다.

담벼락에 죽 끼워 놓았던 그 돌들은 이런 날을 대비하기 위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둘째 형이 새삼 존경스러워졌다.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칼과 낫으로 다듬고 그 앞에는 못을 대고 무명실 칭칭 동여매어 화살을 만들었다. 지금 그런 놀이를 한다면 아마도 경찰 아저씨들이 출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준비한 돌들과 허름한 방패, 활과 화살을 들고 윗동네와 경계를 이루는 언덕 밑의 갈대숲에 진지를 구축했다. 동네 노인 분들이 길가 원두막에 올라 앉아 그렇게 싸움을 준비하는 우리와 윗동네 아이들을 그저 대견한 눈으로 바라보셨다. 드디어 전투가 시작됐다. 당시 유행하던 홍길동 만화와 임꺽정 만화를 섭렵한 둘째 형의 지휘능력은 제법 있어 보였지만 결과는 고지를 오르지도 못하고 참패했다.

우세한 장비를 보유했던 우리였지만 결코 활과 돌로 언덕 위에 위치한 적들을 공격하기엔 지형을 극복할 수 없었다. 몇 명의 아군들이 다치는 등 부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아쉬운 패배를 선언해야 했다. 분해서 입술을 앙다문 둘째 형은 절치부심하며 며칠 후로 다가온 대보름전투에서는 반드시 승리를 이끌어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지형의 특성이 우리의 진지가 언덕 아래에 위치하다 보니 여간 불리한 게 아니었다.

돌을 던져도 위에서 아래로는 힘들이지 않고 던질 수 있지만 언덕 위로 날아가는 돌은 마지막 순간에 힘이 상실되어 효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힘도 들었다. 그때 둘째 형과 동갑내기인 부대장격인 철민이 형이 한마디했다.
“대장, 거 뭐 돌을 던져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으니까 조개껍데기가 어떨까?”
순간 둘째 형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어린 나이에 조개껍데기의 구조가 양력을 발생시킨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누가 알았겠냐만 바닷가에 즐비한 큰 조개껍데기를 던지며 놀 때 맞바람 쪽으로 던지면 낮게 던져도 위로 부양하며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원인도 모르면서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 참으로 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즉시 자루 하나씩을 메고 바닷가로 향했다. 그 넓은 갯벌 가에는 조개를 채취한 후 속살만 꺼내고 버린 조개껍데기들이 패총처럼 널려 쌓여 있었다. 우리는 크고 묵직한 조개껍데기들을 자루에 담기 시작해 순식간에 한 가득씩 제법 무거운 자루를 메고 동굴로 돌아왔다. 우리는 둘째 형과 부대장 형의 지도 아래 조개껍데기 던지는 연습을 했다. 던질 때 손목의 각도에 변화를 주고 그에 따라 최초 던지는 방향에서 어느 쪽으로 휘어지는지, 어떻게 부양하는지 등을 열심히 연습했다. 그 결과 조개껍데기들은 정말로 한 마리 새처럼 날아오르고 투수의 손을 떠난 야구공보다 더 다양한 커브를 그리며 날아갔다.

우리 모두는 흥분했다. 이 사실은 절대 비밀에 붙여야 한다고 모든 부대원들이 손가락을 걸고 맹세했다. 당연히 콧등에 침도 발랐기 때문에 우린 결코 이 사실을 어머니 아버지께도 말씀드리지 않을 것이란 다짐을 했다. 흥분한 둘째 형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어깨에 팔을 돌려 꽉 끌어안고 불타는 전의를 키우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동네 어귀의 넓은 논에서 형들과 밤새 쥐불놀이를 하며 신나게 노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아침에 어머니께 무진장 혼나고 키를 쓰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야, 희철아, 너하고 영범이는 왼쪽에서 방패 뒤에 숨어 있다가 쟤네들이 언덕에서 고개를 내밀면 활을 쏘라고.”
둘째 형은 전장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지휘관처럼 별이 두 개가 그려진 플라스틱 철모를 쓰고 반짝거리는 박달나무 칼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윗동네 애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우리는 먼저 화살로 대응했다. 이쪽의 공격이 그리 매서운 것 같지 않자 윗동네 애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켜 우리 쪽으로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자, 이제부터 공격이닷!”
하는 외침에 일제히 조개껍데기를 던지기 시작했다. 가을 하늘보다 더 파랗고 선명한 겨울의 하늘에 반짝이는 비행접시들이 무수히 우리들의 손을 떠나 언덕을 향해 날아올랐다. 순간 신무기의 출현에 몹시 놀란 윗동네 애들은 멈칫거리며 당황하기 시작했고 그때 한 아이가 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얼굴을 감싸고 넘어졌다.

날카로운 조개껍데기가 그 아이의 이마에 스치자 빨간 피가 얼굴을 적셨다. 아이들 싸움은 피를 흘리면 무조건 지는 것이 불문율 아닌가. 윗동네 아이들은 순간 주춤거리며 당황하더니 이내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을 쳤다.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구경하시던 동네 어르신들의 입가에도 저마다 미소가 번져 있었다. 득의양양한 얼굴들을 하면서 전장을 정리하고 있는데 피를 흘리던 아이의 엄마가 그 아이를 데리고 우리 동네로 내려왔다.
“아니, 애를 요렇게 만들어 놓으면 어찌함메?”
연세 있으신 우리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나서셨다.
“아이고, 아이들 놀고 싸우는데 뭐가 그리 시끄럽나.”
할머니는 그 아이를 데리고 우물가로 가시더니 두레박에 가득 물을 떠올려 얼굴을 씻긴 후 무명 앞치마를 죽 찢으시더니
“영범엄마, 집에 아까징끼 좀 가져 오시오.”
빨간 액체 약을 무명치마에 적시어 상처 난 이마에 질끈 동여매주시고는
“됐다, 이제 가 보그라.”
윗동네 아이의 엄마는 허리를 굽혀 넙죽 인사를 하면서 감사의 말을 잊지 않고 아이를 데리고 돌아갔다.

참으로 그립다. 요즘 세상에선 상상할 수조차 없는 도를 지나친 아이들의 장난도 그렇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관용으로 덮어주던 그 옛날의 정서가 새삼 그리워진다. 흙먼지 폴폴 날리던 그 시절의 길들과 어른의 허리를 넘지 않던 집집의 담벼락들은 언제나 서로 교감하면서 이웃과 알고 지냈다. 밤새워 부부싸움을 하면 동네사람들이 다 알아 다음날이면 얼굴 붉히며 미안해하고 자연스레 서로의 마음에 벽을 허물었는데 이젠 꼭꼭 숨기고 그것도 부족해 나 외엔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이 너무도 많아진 세상이 되어 버렸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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