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녀가 온몸에 폭탄을 장착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자폭하는 모습을 영화 속에서 보면서, 저것도 사랑이구나, 정말로 끔찍한 사랑이구나 싶었어요. 자살 폭탄 같은, 가미카제 특공대 같은, 그런 사랑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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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감라스텐의 낡고 오래된 골목길에 해가 질 무렵 가스등이 하나씩 둘씩 켜지면, 스웨덴이 낳은 영화감독 ‘앙리 베리만’의 우울한 영화들이 떠올라요. 없는 것 없이 풍요롭지만 고독하고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한 곳, 자살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곳, 그곳이 아니었다면 남편을 한눈에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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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종종 왜 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아쉬워하죠. 하지만 어떤 만남도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지 않아요. 이르면 이른 대로 늦으면 늦은 대로 그때만이 누릴 수 있는 사랑의 계절이 있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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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서나 꽃이 피는 계절, 꽃은 우리 마음과 아무 상관 없이, 아니 꼭 우리 마음처럼 흐드러지게 피고 있네요. 저 꽃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어도, 꽃은 늘 내일도 살아남으라는, 꽃이 져도 죽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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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사랑은 명멸하는 불꽃 같은 거라고. 그저 하나씩 둘씩 꺼져가다 드디어는 캄캄한 순간이 오고야 말 생의 불꽃 같은 거라고. 그러니 춤도 사랑도 삶도 캄캄해질 때까지, 더 이상 못할 때까지 계속하는 거라고. 긴 여행을 떠났을 때 실컷 구경 잘했다, 그런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 죽음도 그렇게 맞을 수 있다면 최고가 아니겠냐고.
--- p.83
이 삶이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모를 난민들을 가득 태운 배라 할지라도 노를 저어 가보자구요, 오늘도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고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실의에 빠져 강물에 투신하지만, 그 모든 세상의 풍경들이 다 지구라는 난파선에 타고 있는 우리들 생존의 풍경이겠지요.
--- p.146
사랑이 귀여운 마술일 때, 사랑은 아름다워요. 며칠 전에 누가 보내준 영상 중에 키가 182cm에 83kg의 남자가 아주 작은 상자 안에 몸을 구부리고 들어가 앉아있는 마술을 보았어요. 집중과 명상에 의한 고난도 마술이라는데 그보다는 극한의 상황을 극복하는 묘기였어요. 그쯤 고난도의 사랑에 이르면, 사랑은 자폭하기 일쑤죠.
--- p.158
참을 수 없는 오열이 먹먹한 슬픔으로, 그 슬픔이 삭아 허망한 쓸쓸함으로 남은 떠나간 사람의 자리, 누군가 완전히 잊힌다는 건 그를 애도하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라진다는 것이겠지요.
--- p.199
전쟁이 휩쓸고 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나 역시 장엄한 폐허의 바다를 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죽고 나면 그 폐허의 바다에 도달하겠지요. 적막함 때문인지 달과 전쟁터는 많이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왜 세상의 모든 적막함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갔던 것일까?
--- p.208
그 길고 지루하고 끝이 없는 우리들 인생의 불안을 묘사한 ‘불안의 책’ 속에서 나는 많은 위안을 느꼈다는 걸 고백합니다. 몸과 마음을 지닌 모든 생물은 아프고 괴로운 가운데, 드물게 작은 행복들을 누리다가 결국 이승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단 하나의 진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아니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