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은 이완과 불꽃이다. 멈춘 시간과 늘어진 지루함, 빛바랜 회억의 공간만은 아니다. 차표도 살 필요 없이 그저 기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되는, 비록 애잔함과 무심無心 속일지라도 침목 곁의 푸른 시그널처럼 반짝임을 피어 올리는 순간의 불꽃이 숨어 있다. 졸고 있지만, 다순 기운이 맴돌고, 늘어져 있지만 짱짱한 피돌기가 남모르게 똬리를 튼 채 속살을 채우고 있다.
--- p.25
얽매임과 붙잡힘, 걱정과 초조함에서 벗어나려면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생의 자세가 필요하리라. 과거를 추억으로 채색하고 미래는 희망으로 전환하여, 어젠 오늘의 노둣돌이 되고 오늘은 내일의 징검다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지금, 이 순간을 ‘그래’ 하고 긍정하고 산다면 과거의 아쉬움과 미련, 미래의 불안과 의구심에서 더 자유로워질 수가 있으리라.
--- p.33
사랑은 변하기 쉬운 것이나 인간의 주성분이다. 그동안 변함없는 사랑을 이끌었던 끈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믿음이지 싶다. 깊은 인간적 신뢰가 없이 사랑을 지속하기란 난망하다. 그토록 서로를 신뢰할 수가 있었다는 게 얼마나 숭고하고 고귀한 일인가. 또 하나는 희망, 이는 그들 삶의 나침반이었을 테다. 굳은 약속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져 갈 적마다, 믿음과 희망은 한 줌씩 관솔이 되어 영혼에 새 불씨를 되살려 놓지 않았을까.
--- p.55
세월이 갈수록 자연이 새롭게 보입니다. 세간의 삶 속에서 깨지고 엎어지고 실망했던 순간들을 경험한 후, 비로소 자연을 통해 자신이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연의 본질과 위대함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겠지요. 생각해 보니 자연은 당신을, 수련한 당신은 맑은 자연을 빼닮았습니다. 숲처럼 당신은 평생토록 저의 은결든 상처까지 다 안아주었지 않습니까.
--- pp.72~73
소리가 살덩어리들의 흔적이라면, 목소리는 생명체의 혼이다.생명의 소리는 귀로 듣지만, 혼의 소리는 마음결로 듣는다. 육신의 실체에서 우러난 말을 들을 수 없을 때는 상상 속의 목소리라도 끌어내려고 한다. 목소리가 희미해지면 얼굴마저 지워져 가기 때문이다. 목소리조차 잊힌다는 것은 안타깝고 차마 견디기 힘든 일이다.
--- p.89
생각 끝에 빚어내야 하는 말이 잘못 발화되면 독이 된다. 회초리에 맞으면 얼마 후 상처는 아물지만, 파고드는 나사못과 같은 독한 말에 맞으면 영혼에 상처를 입게 된다. 말을 잘못 뱉으면 상대방의 가슴에 못 치는 일이기에 혀를 잡도리하여 가시 돋친 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리라. 근데 혀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혀는 뿌리가 시킨 일을 할 뿐, 그 뿌리를 타고 내려가면 그곳엔 마음이 있을 테다.
--- p.123
손은 맞잡으면 사랑이지만 휘두르면 폭력이 됩니다. 손을 맞잡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 접촉에 머무르는 것만은 아닐 테지요. 따듯한 손을 통해 향기로운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지요. 다른 이들과 손을 잡을 때는 그 여인의 손이 자꾸 생각납니다. 맵짜고 각다분한 세상, 거친 손일지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맞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손을 가꾸기보다는 먼저 가슴을 다습게 달구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 p.131
생물체는 시간과 인내를 통해 단련되고 생명을 익혀 열매를 맺는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분명히 달다. 저 주황색 감들은 시간과 인내와 기다림이 빚어낸 찬란한 무지개다. 이는 소망을 품고 힘겨운 시간의 늪에서 몸서리치며 밤을 지새운 자만이 깨닫는 삶의 역설이다.
--- p.141
모든 생명체는 시련을 통해 단련됩니다. 아이가 태어나 스스로 걸으려면 넘어지는 과정을 무수히 겪어야 하지요.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준비 기간이 기므로 생의 단계마다 일어설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나중엔 혼자 살아갈 힘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게 얻어진 힘이 평생 삶의 원동력이 되질 않겠습니까.
--- p.162
술렁이는 바람, 서늘하게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비루한 속뜰, 바람은 빈 들판에 스스로 서게 하였다. 생을 지탱해 줄 기본 조건들이 모두 거두어진 황량한 들판에서 만난 것은 갓맑은 바람이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불었고, 지금을 거쳐, 내가 사라진 이후에도 불 그 바람에 영육을 맡기면 안일과 타성의 더께에서 벗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바람은 탐착과 나태를 조금씩 깎아서 거두어갔다.
--- p.167
유혹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성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유혹에 빠져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고 견디며 이겨내는 일이 삶의 도정이지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유혹은 윤리적 성찰이 될 수도, 자신의 나약함을 딛고 일어서는 노둣돌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요.
--- p.196
잎사귀는 땅으로 눈길을 떨어뜨려야 하고, 꽃은 하늘로 머리 둘러야 하는 숙명이라니 애처롭다. 낮엔 서로에게 향할 수 없는 애탐이다. 하나 밤이 되면 어김없이 양쪽으로 마주난 잎을 서로 맞대고 잠을 잔다. 그래서 합환목合歡木이라 했는가. 예로부터 신혼부부의 창가에 심어 부부의 금실이 좋기를 기원했다지. 자귀나무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월 타는 소리가 밀려온다.
--- p.222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부귀를 원했던 미다스, 자신에 맞는 분수와 일상의 만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일깨워 준다. 황금의 순보다 소박한 일상을 중히 여기는 마음이 더 좋은 삶이지 싶다. 남의 부귀와 영화보다는 소소하더라도 내 것이 더 값지다. 남의 것과 내 것을 비교하는 순간 불행은 시작된다.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깎아내고, 작더라도 내 것에 자족하고 감사할 일이다.
--- p.234
잠과 세월에 생을 맡겨 둘 수만은 없는 일이다. 자기 갱신의 욕망이 없다면 세월만 축내는 게 아니랴. 누구든 생명의 단독자다. 생명이란 끊임없는 갱신의 욕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못하면 오늘이 새롭지 않을 것이며 내일은 무력하게 세월에 묻혀 흘러갈 뿐이다.
--- p.250
좋은 시절만 어찌 기대하랴. 어제는 추억하고 오늘은 생명을 일구며 내일은 섭리에 맡길 일이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들은 깨지고 부서질 수밖에 없다. 더러 고통의 바다에서 발을 동동거려 보아야 한다. 탁한 바다가 정화되려면 거친 태풍으로 뒤집혀야 하듯이. 이는 생사의 늪에서 몸서리나게 밤을 지새운 자만이 깨닫는 삶의 역설이다. 그렇다. 살 때는 전심을 다해 살고, 죽을 때는 미련 없이 철저히 죽어야 하리라.
--- p.270
우린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에서 동행하며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이란 종착역이 아니라 삶의 여정 중에 있다. 어떤 길에서 누구와 동행해야 할까는 각자 선택해야 할 생의 몫이다. 어떤 동행을 하는가에 따라 그 삶의 빛깔과 향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린 어떤 형태로 동행同行하며 어떤 모습으로 동행同幸으로 가고 있는가를 되새겨 볼 일이다.
--- p.279
분별하기가 난망하지만, 시간이 하는 말을 침묵 속에서 귀 기울여 볼 일이다. 우리가 평등하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다. 낮고 보잘것없거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에게도 분명 시간은 있다. 생은 시간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 시간은 바뀌지만 시시각각時時刻刻 움직인다. 아 혼란스럽고도 안타까운 시간이여!
--- p.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