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인과 유난한 강아지, 17년의 기록
도서3팀 박숙경(beblue84@yes24.com)
2016-10-05
특별한 일정이 없는 주말이면 습관처럼 나가 반나절쯤 앉아있는 동네 카페가 있다. 늘 야심차게 책이며 노트북을 바리바리 싸 들고는 가지만, 막상 하는 일은 창가에 늘어져 광합성 하다 조는 것이 전부인 내 아지트. 오가는 사람이 적은 한적한 골목 안쪽에 있는 이 카페 맞은 편에 어느 날 강아지 분양하는 가게가 하나 오픈하더니, 애완동물 분양 샵이며 병원, 호텔, 관련 용품을 파는 가게가 연달아 생겨 그곳은 이년 새 펫샵 거리가 되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작고 연약한 짐승에 일단 넋을 놓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실제로 애완동물을 들이고자 하는 결심은 쉬운 일이 아니라 의외로(?) 실구매자는 분명하다. 그래서 다행히도 이런 가게들이 연달아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골목이 북적거리는 것은 아닌지라 그러한 변화가 주말의 휴식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기본적으로는 나도 개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라, 카페 밖의 풍경이 바뀌는 걸 얼마간은 즐겁게 감상했던 것 같다.
몇번의 계절을 지나며 관찰해 보니, 이 쪽 시장(?)도 패턴이 있다. 분양샵의 경우를 보자면 겨울, 특히 십이월 중순 전후로 가장 사람이 많고, 봄이 되면서 점점 줄다가 사월 말, 오월 초쯤 한번 더 방문객이 는다. 여름이 되면 거의 손님이 끊어지고, 그 때 리모델링을 하거나 더러는 주인이 바뀌는 가게들도 있다. 여름부터 추석 명절까지는 오히려 분양 보다는 애완동물 호텔 쪽이 문전성시다. 손님으로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가장 많다. 젊은 부부가 초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방문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화 내용은 잘 들리지 않지만 아이들은 거의 엄마한테 매달려 애원조가 되고, 엄마는 무언가 끊임없이 다짐을 받는 듯한 태도다. 부모와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치고 새 식구를 안고 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그 애정어린 눈빛이 오로지 품 안의 작은 생명체에게로만 향하는 모습은, 딱 그 순간만 있었으면 싶은 그림이 된다.
아이가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동물을 벗삼아, 동생삼아, 애인삼아 마음을 나누고 애정을 주기를, 또 받기를. 그 이년 동안 눈에 띄게 늘어난 '버려지는 애완동물'에 대한 뉴스를 생각해보면 그것도 참 요원한 바람이구나, 싶지만.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에게 무엇을 바랄까? 그들의 무엇이 되기를 바라고, 그들에게 어디까지 허락할까? 애완동물과 사람의 관계는 어떨 때 가장 이상적일까? 그 생명의 죽음과 그로 인한 애착의 분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는(못하는?) 나에게는 사직동의 가난한 시인과 유난스러운 개 또또, 이 조합도 어느 순간에는 견디기 어렵다. 말 못하는 짐승이 어디가 아픈지, 무엇이 무서운지, 상처를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그 치열한 시간이, 그래서 '고작 짐승'으로 치부할 수 없는 그 관계가 슬프다. 아, 또또가 그저 예쁘고 포근하고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것만으로 제 할 일을 다 할 수 있었더라면. 차라리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초반에 의사가 짐작했던 것처럼 목숨이 길지 않았더라면. 마음을 열고, 공간을 공유하고, 결국은 이 작은 개가 통과하는 시간의 흐름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련의 기록을 ‘위안’이었다고 말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을 안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개를 계속해서 예뻐하겠지만, 기르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롯이 나에게 의지하고, 나의 기쁨에 곧 저의 기쁨이 되는, 의심도 없고 한마디 불평도 없는 생명의 무게는 절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 예쁘고 가여운 것들은, 최근 들어서는 길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마음의 빗장을 열려고 한다. 무수한 이야기를 담은 그 반질반질한 눈을 보며 용기 없는 나는 그들이 떨어져 나온 따뜻한 품으로 돌아가기를, 너무 오래 길 위에서 헤매지 않기를 무책임하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