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갑산 마을은 조선 시대에는 초계군 갑산면에서 면 이름과 같은 갑산이다. ‘원갑산’으로도 알려진 오래된 역사를 지닌 마을로 산줄기로는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분기한 진양미타대암단맥의 마지막인 용덕산(해발 231m)이 마을 북쪽과 서쪽을, 황강이 동쪽을 감싸며 흐르고 있다. 용덕산은 조선시대 초계군수가 가뭄 때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해서, 이곳은 용의 덕을 보는 것이라 해서 ‘용덕산’이라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무운절(묵은 절, 古寺)이라고 부르는 뒷산 자락의 밭은 옛 절터였음이 밝혀졌다. 그곳에서는 고려 시대 사용하던 종이 발굴되기도 했다. 마을 앞 황강 건너엔 우리 초계 정가의 시조를 모신 옥전서원이 옛 가야 소국인 다라국의 옥전고분과 나란하게 있고, 마을 뒷산엔 진양 강씨 선영이 있는 갑산재, 옆 마을엔 초계 변씨 시조 사당인 영모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풍수지리설의 명당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고향마을, 갑산」중에서
이미 저세상으로 간 동생을 낳은 뒤에 얻은 척추결핵으로 어머니는 30년 가까운 세월을 고생하셨다. 어린 나이에 동네 사람들이 “인천댁 오늘을 넘기겠나?”라고 수군대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 그 말이 어머니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자라면서 알아차렸다. 그때마다 유명한 무당을 불러 벌였던 굿판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했던 것 같다. (중략)
그 당시에 나는 한가지 버릇이 있었다. 고등학교 다니던 대구에서 고향 집을 다녀올 때, 고향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고향마을이 있는 고개를 단숨에 올라서 마을 복판에 있는 우리 집을 살폈다. 우리 집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어머님이 별세하실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살펴본 우리 집이 조용하면, 안도의 큰 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큰아들보다 13살이나 어린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지극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꾸중을 들은 적이 없다. 계성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구로 유학을 떠난 후에도 아들이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셨다는 얘기를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들었다.
---「병마와 함께한 어머님의 삶」중에서
1987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경술국치(1910년) 다음 해인 신해년에 없는 집안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격동의 시절을 온몸으로 체험하신 아버지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지랭이 촌농부였다. 아홉살 땐 꼴 머슴으로 살았고, 일제 시기엔 일본 오사카와 고베항의 일용 노동꾼으로 다녀오셨다고 했다. 마을 초계 변씨 종중 논밭을 경작하는 고지기(창고지기) 역할도 하시며, 심는 대로 거두는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한평생을 살다가 가셨다. 아버지가 고지기 역할을 했던 나의 어린 시절, 온 가족이 변씨네 묘사 음식을 만들 때는 정말 즐거웠다. 아버지와 함께 변씨 묘사에 참석해서 이분들의 귀여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이내 아버지의 직업이 자랑스럽지 못한 것을 눈치를 채고는 따라다니지 않았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 생각해보니 가족을 위해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내신 참 자랑스러운 아버지셨다.
---「고지기였던 아버지의 삶」중에서
외가는 1938년에 만주로 이주했다. 외사촌 4남매와 조카 15명은 하얼빈 부근 상지시에서 자랐고, 현재 그 손자들은 남쪽 남영에서부터 서쪽 시안까지 전 중국에 걸쳐 살고 있 다. 장인 어르신 형제들은 1930년대에 일본으로 이주하여 한 분은 일본 여성과 결혼해서 귀국했고, 한 분은 전후 일본으로 귀화해서 처사촌들이 후나바시에 살고 있다. 어쩌 면 우리 가족은 바빌론 유수(B.C. 587~ B.C. 538)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대인 같은 ‘Korean Diaspora’라고 할 수 있겠다.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외가의 상황은 이렇다. 혼란하던 시기에 살길을 찾아 만주로 이주했고, 해방이 바로 생이별이 된 것이다. 이산가족의 애환은 현대 우리 민족사의 일부 이기도 하다. 1979년, KBS의 ‘사회교육방송’에서 친정 식구를 그리는 어머님의 육성을 내보냈다. 왕래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식이라도 찾기 원하는 마음에 부모님의 육성을 녹음한 테이프를 방송국에 가져가서 방송한 것이다. 그해 12월 친정 조카가 고모부를 애타게 찾는다는 편지를 받고 온 집안이 눈물바다가 되었고, 가족들과 연락이 된 기쁨에 어머님은 40년 지병이 호전되었다.
---「‘Korean Diaspora’의 DNA」중에서
자서전을 직접 쓰며 돌아본 72년 인생
2018년 가을에는 500km 가까이 떨어진 고향까지 걸어가 보겠다는 청년 시절의 꿈을 실행하리라 결심했고, 2019년 겨울에는 인생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걷기 행사 즈음에 출판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갑작스러웠던 2020년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2021년 늦여름에 걷기 행사를 개최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2023년 이제야 자서전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래도록 자서전을 준비하며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다 보니, 고향까지 더 깊이 있는 걸음을 해낼 수 있었다. 걷기 행사가 끝나고 한참 뒤에 자서전을 마무리하다 보니 걷기 행사와 내 인생을 같이 담아놓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자서전 출간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엇인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한 마음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글쓰기에 대한 어려움을 경험했고, 작문에 대한 재주가 없음을 깨달았다. 특히, 철학도로서 근무하며 오래도록 보고서를 작성한 탓에 수없이 드러나는 숫자나 사실에 대한 나열은 없애기 어려운 습관이었다. 이 또한 ‘철이 덜 든 철학자’인 내 글쓰기의 개성이라고 인정하며 일부러 남겨두었다. 그 외에도 중복된 내용이나 사실관계의 실수가 있다면 부족함 많은 필자의 책임이니, 너그러이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말보다 실천’을 좌우명 삼아 실행에 집중하는 성격이지만, 여전히 거절하지 못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지 못하여 후회할 때도 많았다. 무엇보다 글을 쓰다 보니 가족에게 미안함이 크게 남았다. 남들에겐 그리 관대하면서 가족에게는 왜 그렇게 못하는지 딜레마이자 아직 내게 남은 가장 큰 숙제다. 독립된 개별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고, 가족을 나와 동일시하여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라는 독선으로 강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족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무엇보다 한결같은 희생으로 묵묵하게 지지해준 또순이 아내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사회가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분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에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조금 덜 악의적이고 좀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한 단락이 자서전 원고를 작성하는 내내 머리에 맴돌았다. 이 책은 공학도로서 평생 철을 만났지만, 아직 ‘철이 덜 든 철학자’인 정인조가 72년을 살아온 이야기를 남겼다. 되돌아보니 자랑스러운 일도 있지만, 후회되는 일들도 적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올 하루하루를 후회 없는 날로 만들어 나갈 ‘철이 가득 든 철학자’정인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2023년 7월 11일 정인조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