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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배반

다산의 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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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02일
쪽수, 무게, 크기 318쪽 | 140*210*30mm
ISBN13 9791192828206
ISBN10 1192828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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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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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자전, 모전여전. 유전자는 한 인간을 따라다니며 요술을 부린다. 더불어 한번 맺어진 관계는 질기기가 쇠심줄이다. 굴레를 벗어나려 몸부림친들 헛수고다. 누가 그 자리에서 한 발 앞으로 나설 수 있으랴! 제풀에 주저앉을 거면서. 인간은 자신의 숨 쉬던 방죽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삶을 마감한다. 나무뿌리를 흙 속에 심어야 생명을 포실하게 유지하듯이, 나무와 사람의 차이가 다를 리 없다. 누가 건들면 그제야 뽑힌다. 목숨을 거두어야 그곳을 떠나 딴 세상으로 향한다. 정연이는 공원 입구에 들어섰다. 삼십이 다가오는 딸 박다현과 함께 걸어간다. 가방 안에는 이제 20대에 멋모르고 휴대하고 다녔던 농약병 대신 단소가 들어 있다.

덕분에 그녀는 덜컥 임신이라는 쇠사슬에 걸렸다. 처음엔 임신인 줄도 몰랐다. 음식 냄새가 싫고 비위가 홱 돌았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인체의 신비에 대한 얄팍한 상식은 구름 잡는 것뿐이었다. 그 어느 한 가지도 실제 생활에 적용되지 못하는 휴지 나부랭이였다. 실사구시가 실학의 근본이라고 배웠지만 이론일 뿐이었다. 애인이 생겨 결혼할 상황이 아니면 둘 중 누군가는 제대로 된 피임 상식을 알고 실행해야 하지 않았을까? 무식하게 준비 없이 당하다니 그것도 한번이 아니고. 아, 여러 번을.

아기 볼 사람 없이 아빠가 집안일 전담하다시피 저를 돌보다가 돌아가신 후 엄마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어요. 요즘처럼 유아원, 유치원을 맞춤식으로 운영하던 시절이 아니니까요. 늦잠이 많아 시큰둥한 저를 깨워 세수시키고 옷 입히고 밥 몇 술이라도 먹게 하느라 소동이 많았던 시절을 지금까지 기억하니까요. 저를 혼자 집에 두고 나가기는 어중간한 나이라 아침에 일찍 서둘러 준비해서 같이 나가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저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셨으니까요. 다행히 집 앞에 교회가 운영하는 유아원이 있었어요. 엄마는 그곳에 저를 맡기고 출근하고, 전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혼자 놀며 심심하게 지내야 했어요. 유아원 친구들은 늦게 오고 일찍 자기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으니까요.

내가 용기가 있었다면? 내 생애 최초로 그 황홀한 분위기에 휩싸여 다짜고짜 그녀를 끌어안고 이마에든 코에든 눈썹에든 입맞춤을 시도했을 것이다. 이제 좀 어색함이 풀렸다고는 해도 갈 길은 멀고도 멀었다. 턱 안심을 하고 잠자코 따라오는 발자국과 숨소리가 너무 생생해서 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듯했다. 달빛 아래 산은 신비로운 자태로 우리를 굽어보면서 웃음 짓고 있었다. 밤기운이 차지도 덥지도 않았기에 흐뭇했다, 그녀는 철길 건널목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을 얻어 남동생과 자취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헤어져야 한다. 내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대문 앞에서 그녀를 들여보내고 뒤돌아서 집 쪽을 향해 걸었다.

정연이는 혼잣소리를 중얼거린다. 입버릇을 들이니 심심하지 않다. 시간의 흐름을 건너뛴다. 차마 버리지 못한 소지품을 전시하듯 죽 늘어놓으니 하루가 지루하지 않다. 곁에서 그대로 느낀다. 비록 숨 쉬는 것도 볼 수 없고, 만져 볼 수 없지만, 영혼은 또렷하게 그녀의 의식 안에 가슴 안에 남아 따스하다. 다현이와 생뚱해져 버린 관계를 멀리서 바라다본다. 앙금을 풀지 못한 채 다현이는 저세상으로 날아갔다. 괘씸죄의 산물이다.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자기최면을 걸면서 사는 그녀와 호강에 겨운 여자들을 비교 대상으로 내세우다니. 엄마의 진면목을 모르고 역린을 건드리고 부채질한 결과다.

법원에서 잔인한 달 4월 1일 오후 2시 반 노익장 정일섭이 제기한 민사재판이 열렸다. 두 사람의 재판이 앞서 끝나고 정일섭 가족의 공판이 시작됐다. 양쪽 변호사는 뒷자리에 있다가 그들의 이름과 사건번호를 읽자 곧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가운데 앉아있는 재판장의 연단 아래로 가서 양쪽에 앉았다.

원고 측은 판사 오른편쪽에 긴 의자가 줄지어 있는 변호사 옆에 앉았다. 정일섭은 처음 재판 시작할 때 출석했다. 오늘이 두 번째다. 재판이 끝난 뒤 담당 변호사에게 판사의 의도를 질문했다. 법원의 입장은 관련 서류다. 인감도장을 건네고 사인을 본인이 했다는 게 걸림돌이다. 여러 번 재판이 속개됐지만, 변호사에 일임했으니 구태여 참석 안 해도 된다고 만류하여 나오지 않았다. 재판이 길어지면서 딸들이 탄원서를 써서 아버지 입장을 옹호했다.

그런데 두 달 전 재판에서 장남 변호사 측에서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원고 말이 바뀐 것은 치매가 의심되니 재판정에서 확인해 달라는 요구다. 90대의 정일섭은 응해야 했다. 장남의 배반은 신경쇠약 증세를 심화시켰다. 말투마다 짜증을 실은 울화증은 죽과 술과 담배로 간신히 버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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