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심리학, 철학, 인류학 등 감정에 대한 관심을 주장하는 어떤 분야에서도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럴듯한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혐오가 점잖지 못하다는 것이다. 문명은 혐오를 사회 통제와 정신 질서의 핵심 요소로 만들기 위해 우리의 혐오에 대한 민감성을 높였고, 그 결과로 문명인들은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유년기나 청소년기가 아니고서는, 또는 변태적인 농담이라는 구실을 대지 않고서는 혐오스러운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선망, 증오, 악의, 질투, 절망과 같은 다른 부정적인 정념들은 품위 있게 논의될 수 있다. 그런 정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얼굴을 붉힐 필요도 없고, 킥킥거릴 충동도 필요 없고, 충격 받을 일도 없고, 싫증을 낼 필요도 없다.
--- p.27~28
사랑은 극복해야 할 혐오가 없다면 거의 이해하기 어렵다. 도덕적이고 육체적인 청결의 미덕과 잔인함과 위선을 증오하는 일에 우리 자신이 전념하기 위해서는 혐오에 의존해야 한다. 이 책에서 나의 핵심 임무는 감정, 특히 혐오와 경멸 같은 감정이 특정한 종류의 사회적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p.52
다시 우리는 그리도 많은 혐오스러운 것들의 가장 골치 아픈 측면 가운데 하나를 회피할 수 없다. 그것은 혐오가 사람들을 밀어낼 뿐만 아니라 끌어들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혐오스러운 것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혐오는 유혈이 낭자한 사고에서 눈을 돌리거나 배설물의 양과 질을 확인하지 않기가 어렵다는 데서, 또는 공포 영화와 실제로 섹스 자체가 발현하는 유인력에서 매력을 발휘한다.
--- p.57
두 감정이 사랑과 얼마나 다르게 교차하는지와 관련된 맥락에서 생각해 보라. 사랑과 경멸은 상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랑은 부득이 경멸과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이나 동물이 귀엽다는 판단은 그 사람이나 동물이 사랑스럽게 하위에 있고 비위협적이라는 판단이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의 반려동물과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여긴다. 대등한 사람들 사이의 사랑도 변함없는 평등을 인정하는 문제라기보다는 번갈아서 상위에 있거나 하위에 있는 문제이다.
--- p.74-75
헤라클리투스 이래로 도덕주의자들은 배설물로 가득 채워진 자루로서의 피부의 이미지를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탐닉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피부는 아름다움의 일등공신이라고 여겨졌고, 피부의 노출은 항상 에로틱하고 관능적인 것을 자아냈다. … 피부가 내부의 혐오스러운 물질을 덮었다 하더라도, 곪은 내부가 표면으로 분출되어 피부를 더럽히면서 그 위에 적나라하게 나타날 수 있다. 특히 괴상한 방식으로 피부를 공격하는 질병은 종종 내면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비유로 이해된다. 따라서 한센병과 매독은 (오늘날의 에이즈처럼) 도덕적 고통과 죄의 대가로 여겨졌다.
--- p.110
나는 모든 성관련 혐오 중에서 정액이 남자들에게 가장 역겨움을 주는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액이 오줌과 통로를 공유하기 때문도 아니고 심지어 다른 주요한 혐오의 특징(정액은 끈적끈적하고 들러붙고 찐득찐득하다)을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정액이 위엄을 파괴하는 조건 아래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즉, 정액은 사정 후의 불쾌감에 수반되는 짧은 수치심의 전주곡이다. 정액에 대한 남성들의 혐오는 여성 혐오와 적지 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까다로운 도덕주의자는 여성을 비난할 때 종종 정액의 역겨움과 (여성들이 끌어들인 것으로 비난받는) 남성의 성적 접촉의 오염력을 상정하고 있다.
--- p.196-197
특별히 많은 양이 한 번의 노력으로 방출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산물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꽤 기뻐한다. … 우리는 농도, 냄새, 색깔, 양에 대한 은밀한 분류 체계를 가지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코를 풀고 나서 짧게라도 휴지나 손수건을 확인하는 게 얼마나 흔한 일인가에 항상 놀란다. 즉 우리는 우리의 배설물 때문에 고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생산물에 적극적인 관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덜 성공적인 생산물이나 많은 양의 조짐을 보였지만 덜 생산된 것에 대해 분함과 불안과 실망을 겪는다.
--- p.221-222
혐오한다는 것은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이며, 뱃속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혹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련된 자들의 혐오, 즉 그들의 좋은 취향은 다른 사람들의 취향 부족에 대한 반감이다. 다시 말해, 탐닉하고도 혐오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 세련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반감이다. 이것은 제임스 1세 시대의 우울한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성교의 유행에 대해 가졌던 과잉의 공포와 유사하다.
--- p.304
혐오는 주장의 가시성, 감지 가능성, 구체성, 순전한 명백성을 요청한다. 혐오는 아마도 다른 어떠한 감정보다도 상호주관성의 문제를 덜 제기할 것이다. 당신이 사랑한다거나 후회한다고 말할 때면 나는 당신이 혐오스럽다고 말할 때 내가 확신하는 것만큼 당신의 내면 상태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사랑과 후회의 느낌은 혐오의 느낌만큼 쉽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소름끼치거나 더럽혀졌다고 느낄 때, 나는 당신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다. 그래서 혐오는 대부분의 감정보다 더 잘 소통한다.
--- p.348-349
민주주의가 한 일은 이전에는 상층만이 이용 가능했던 경멸의 일부를 낮은 자들에게도 무장시켜 준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이제 민주주의가 자신과 똑같이 취급하는 경멸할 만한 다른 모든 사람의 투표권과 비교해서 가치 절하되었던 자신의 투표권에 대해 생각할 자격이 있다. 이것은 적지 않은 성취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구질서와 다르게 만드는 것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 p.415-416
나는 상향 경멸과 민주적 이상의 일반적인 내면화 사이의 역사적 연관성을 가정했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높은 사람에 대한 경멸을 정당화하고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 대한 경멸을 표현할 특권을 어느 정도 실추시킴으로써 가능했다. 달리 말하면, 민주화가 특정 감정들의 적절성에 변화를 수반했다는 주장이었다. 적절한 경멸의 지형이 바뀌고 있었다. 높은 사람들은 여전히 낮은 사람들에 대해 경멸감을 느꼈지만, 그들은 이제 그렇게 느끼는 것에 대해 사소한 죄책감, 불안, 또는 자기 의심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는 주로 우리의 관심을 계급 문제에 한정했고,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감정 경제의 핵심적인 변화를 찾아냈다. 그 변화는 해즐릿, 토크빌, 고드윈과 같은 저술가들이 증언했던 것인데, 그들은 모두 이전에는 경멸의 대상이기만 했던 이들에게 경멸을 표현할 권리를 확장하는 혁명적인 결과를 인식했다. 계급과 지위는 먼저 공격받은 범주들이었고, 그 과정은 억제될 수 없었다.
--- p.417-418
경멸스러운 것은 위협이 되지 않을 때 우스꽝스럽거나 비가시적이다. 경멸스러운 것은 위협이 될 때 혐오스럽다. 그 위협은 인식되기만 하면 된다. 어떤 독립적인 척도에 의해 반드시 실재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권력, 수, 또는 위치와 관계없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그리고 유사하게 남성이 여성을 더 위협적인 것, 더 기이한 것, 덜 공식적인 권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 p.421
중요한 것은 냄새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는 것이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반감은 극복 불능이다. 살인자나 남색자(男色者)에겐 호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입 냄새가 지독한(상습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사람에겐 호감을 가질 수가 없다.” 노동계급이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고 믿도록 양육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고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 p.426
경멸은 위협받는 것을 부정하거나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 척함으로써 작동한다. 반면 혐오는 필수적으로 위험과 위협의 존재를 인정한다. 혐오는 그래서 어울리지 않는 반응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혐오는 종종 혐오스러운 위협의 근원을 제거하거나 심지어 근절시키려 한다. 그러나 뿌리 뽑으려는 욕망에는 양면성이 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정의한다. 바람 부는 방향대로, 우리도 그들이 필요하다.
--- p.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