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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나바 바라티의

숭고미의 미학(味學)

: 그 <미적 경험>, 차맛카라!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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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예술철학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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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17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24쪽 | 138*200*22mm
ISBN13 9791185062457
ISBN10 118506245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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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감탄하고 이끌린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보고, 어떤 이는 〈아름다운 행동과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행위〉를 보고, 또 어떤 이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광〉을 보고, 어떤 이는 〈아름다운 시나 황홀한 음악〉을 듣고서, 또 어떤 이는……
우리는 모두 〈(나름의) 아름다운 것들〉에 끌린다. 우리의 시선은 그쪽을 향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우리 눈의 동공(瞳孔)은 무의식적으로 더 열리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들떠서 그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도 잘 알아채지 못하는 〈인간 정신 요소〉의 이상(理想)인 진선미(眞善美)의 무의식적인 추구에서 나온 어떤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신비가들의 황홀경인 “삿-칫-아난다” 즉 〈존재(存在)-의식(意識)-지복(至福)〉이라는 그 어떤 것의 “맛(味, 라사)”일지도 모른다.


〈궁극의 실재〉를 향한 우리의 〈궁극적 관심〉인 종교를, 만약 종교학자 루돌프 옷토처럼, 이렇게 정의한다면……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두렵고도 매혹적(魅惑的)인 신비(神秘)!”

〈그것〉은 저 미학자(美學者) 에드먼드 버크의 책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즉 〈숭고(崇高)와 아름다움(美)이라는 우리의 관념의 기원(起源)에 대한 철학적(哲學的) 탐구〉라는 제목처럼 미학(美學)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철학적(Philo-sophical) 탐구”는 당연히 〈진리(眞理,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진지하고 줄기찬 사랑(善美)〉이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미(美)의 역사〉는 처음에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인 미를 다루면서 이런 말로 시작한다. 미(美)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유명한 델피의 신탁(神託)은 이렇게 선언한다고 전한다.
“가장 올바른 것이 가장 아름답다!”

필자는 이 〈신탁(신의 말씀)〉을 따라 〈아름다운 것〉과 〈가장 아름다운 것〉, 그리고 〈올바른 것〉과 〈가장 올바른 것〉을 찾아보려고 한다.

필자는 미학자가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그렇게 읽으려들지 말길. 필자는 미학을 잘 모른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과 올바른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만큼은……
어쨌든 미학과 문학, 예술을 끌어다 쓸 것이다. 그들 역시도 분명 아름답고 올바르고 숭고한 것을 느끼고 추구했을 터. 그렇지만 이 책은 〈미학(美學) 서적〉이 아니다, 그래서 미학(味學)이라고 했다.

일찍이 저 탄트라 알로카를 쓴 아비나바굽타는 후에 아비나바 바라티라는 책도 썼는데, 바라타의 〈나탸 샤스트라〉에 대한 주석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탄트라 알로카를 번역했던 라니에로 뇰리(Raniero Gnoli)는 1956년 - 필자가 태어난 해다. - 〈아비나바굽타에 따른 미적 경험〉이라는 작고 아름다운 책을 썼는데, 바로 아비나바 바라티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책은 뇰리의 그 책을 따른 것이고.
“가장 올바른 것이 가장 아름답다!”

올바른 것을 찾아 아름다운 것을 맛보려는 일에 무슨 시비가…… 일찍이 아비나바굽타는 말했다.

“만약 내가 잇차(맛보려는 ‘입맛’)를 갖지 않으면 지식(맛보아 아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어떤 것이 나타났을 때, 그쪽으로 향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피하는 것이다. (선뜻) 향하는 일은 (이전에, 아니면 전생에 가졌던) 아난다(기쁨의 맛)의 경험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사람이 자신이 싫어하거나 모르는 것 쪽으로는 잘 나아가지 않는 이유다.”

그러니 혹 행운(복)이 있으면, 아니면 혹 인연이 있으면, 아니면 혹 하늘의 뜻이 있다면……, 우리는 성경이 권하는 그 유명한 것을 맛볼지도 모른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여기의 여호와는, 물론, 소위 이 현실의 교회나 시원찮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것이 전혀, 전혀 아니다. 이것은 필자가 피를 토하며 밝히려고 하고, 드러내려고 하는 무엇이다.

여호와는 야훼 즉 〈있는 (이) 무엇〉이다. 한자로 실재, 현존이다. 참나, 얼나다. 〈모든 것(전체성)〉 아니면 〈하나님(一者性)〉이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그것에게는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맛본” 인간들은 분명히 있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성경의 용어로는 〈성령 받은 자〉, 불교의 용어로는 〈깨달은 자(붓다)〉, 트리카 용어로는 〈은혜를 베푸는 존재(쉬바)〉 등으로 부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내가 바로 그런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또 안내하기 위해서다. 굳이 말하면 주로 샥토파야가 이끌어가는……
그러므로 플라톤의 〈향연(饗宴, Symposium)〉에 나오는 저 현명한 무녀(巫女, 여선지자) 디오티마의 말대로 차근차근히 할 일이다. 아름다움과 숭고를 “느끼는” 일은 우뇌(右腦)의 것으로, 이른바 감정의 일이지만, 샥토파야는 좌뇌(左腦)의 것, 지성(이성, 언어)의 일이기 때문이다!
(좌뇌와 우뇌에 관한 것은, 바로 나의 뇌에 관한 것인 만큼, 비갸나 바이라바의 〈나가며〉 부분 등을 참고하라.)
이 책을 꾸미며 참고한 책과 또 읽어야 할 책을 몇 권 소개한다.

1. 『The Aesthetic Experience According to
Abhinavagupta』
- 아비나바굽타에 따른 〈미적 경험〉 - 라니에로 뇰리, 2015

2. 『The Natya-Sastra(나탸 샤스트라)』
- A treatise on Hindu Dramaturgy and
Histrionics(인도 극작법과 연극의 연구) - Manomohan Ghosh 역(譯), 1951

3. 『미(美)의 역사』
움베르토 에코, 2017

4. 『앙겔루스 노부스』
- 탈근대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미학사 - 진중권, 2017

5. 『인도(印度) 음악(音樂)』- 윤혜진, 2009


“숭고(崇高)”라는 한자어는 〈높을 숭, 높을 고〉로 “뜻이 높고 고상(高尙)하다”는 뜻이고,
숭고미는 “숭고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으로,
철학에서는 〈미적 범주의 하나〉로, “자연을 인식하는 ‘나’가 자연의 조화를 현실에서 추구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미의식(美意識)이 나타난다. 〈인간의 보통 이해력으로는 알 수 없는 경이(驚異), 외경(畏敬), 위대(偉大)함 등의 느낌〉을 준다.”고 국어사전은 말한다.

철학과 종교의 경계(境界)가 무엇인가?
“경계”라는 것이 실제로 있기나 한 것인가?

숭고미(崇高美)가 “인간의 보통 이해력으로는 알 수 없는 경이(驚異), 외경(畏敬), 위대(偉大)함 등의 느낌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종교의 저 “성(聖)스러움”일 수도 있다.
그래서 미학(美學)이라는 취미(趣味)의 맛(味)에다 이 『숭고미의 미학(味學)』의 맛(味)과 〈성스러움의 의미(意味)〉의 맛(味)을 더한다면……

6. 『성스러움의 의미(意味)』- 루돌프 옷토 지음, 길희성 옮김, 2021
--- 「들어가며」 중에서

아비나바굽타는 10세기 후반 카시미르에서 일명 추쿨라로 알려진 나라싱하굽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난다바르다나의 〈드바니-알로카〉를 제외하고는, 밧타 롤라타, 샹쿠카, 밧타 나야카 등의 이론들은 그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졌다. 미학 분야에서 그의 작품은 두 가지로, 나탸 샤스트라의 주석인 〈아비나바 바라티〉와 드바니-알로카의 주석인 〈드바니-알로카 로차나〉이다. 시학에서 그의 스승인 밧타 토타의 카뱌카우투카에 대한 주석은 지금은 없고, 카뱌카우투카 책 자체도 전해지지 않는다. 드바니-알로카 로차나는 드바니 학파에서는 아주 중요한 작품으로 그 발전에 공헌했다.

아비나바굽타는 나야카의 미적 개념의 핵심인, 〈보편화의 개념〉은 받아들이나, 〈미적 경험이 지식보다는 성과라는 개념〉과 〈시적인 말이 계시의 힘이라는 추정 개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비나바굽타의 견해에서 드바니와 라사 학파는 떼어놓을 수 없게 용해되어 있고, 아난다바르다나가 말하지 않지만, 라사는 암시로 나타난다. 〈미적인 맛보는 일〉은 모든 것과는 다른 〈순수한 인식〉일 뿐이다.
“라사”는 독특하다.¹ 〈영구적 정신상태(감정)〉에 상응하는 아홉 가지 라사의 구분은 오직 ‘경험적’일 때만 - 오직 ‘인식’일 때만 - 가치를 갖는다.²

1. 아비나바 바라티에서 그는 〈모든 라사는 “하나의 거대한 라사”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2. 아난다바르다나와 아비나바굽타는 아홉 번째 〈영구적 정신상태〉와 라사를 받아들인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즐겨지는 그 무엇〉은 지복으로 가득한 〈의식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무슨 고통의 의심(느낌)이 있겠는가? 우리의 영(靈) 깊은 곳에 있는 기쁨, 슬픔 등의 그 감정들은, 그것에 변화를 주기 위해, 오직 한 가지 기능만을 가진다. 재현의 기능은 그것들을 깨우는 것이다.”

또 앞에서도 인용하였듯이 “〈미적 경험〉은 마치 마술로 생겨나는 꽃처럼, 그 핵심은, 오로지 ‘현재’이다. 그것은 〈이전에 온 무엇〉과도 〈이후에 오는 무엇〉과도 관련이 없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밧타 나야카가 말하는 〈보편성의 상태〉는 〈시공간을 구분하는 일을 없애는 것〉뿐 아니라 〈어떤 특별한, 아는 주체를 암시하는 것〉이다. 밧타 롤라타의 질문, 즉 라사가 어디에 있는가, 〈배우에게 있는가, 재현된 인물에게 있는가〉는 아비나바굽타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라사는 배우 안에 있지 않다. 그러면 어디에? 그대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내 (이미 말했던 것을) 다시 떠올리리라. 진실로, 라사는 시간과 공간, ‘아는 주체’의 차이에도 제한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그대의 의심은 의미가 없다.
그러면 배우는 무엇인가? 배우는 〈맛보는 일의 수단〉이다. 그래서 ‘그릇’이라고 부른다. 포도주의 맛은 맛보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인 그릇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배우는 단지 처음에만 유용하고 필요하다.”

이 〈개개의 아는 주체들을 제거하는 일〉은, 즉 〈서로가 다른 “실용적인” 관객들의 그 인격을 제거하는 일〉은 〈유일하고, “보편화된”, 시공간 등 어떤 결정에 둘러싸이지 않는 아는 주체〉, 의식(意識)의 상태로 이어진다. 이 개념은 아비나바굽타가 속한 철학파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1. 잘 아는 대로 여러 “에고(나)” 사이의 차이는 환영(幻影)이다. 실제로 “나” 즉 의식만이 유일(唯一)하다.
1. 이런 이유가 이 미학(味學)이란 미학(美學)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다. 그리고 전에 소와 참나 이야기에서도 고백했지만, 필자는 작가도, 시인도, 예술가도 전혀,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쪽의 전문용어는 더더욱 잘 알지 못한다.

불교의 유식학파(唯識學派, 비갸나-바다)에서는 실재(實在)는 의식(意識)이지만 여러 개체성 혹은 “정신적 연속성(삼타나, 相續)”은 서로가 다르다고 하는데, 〈한 사물은 똑같은 시간, 공간에서 그것을 보는 많은 주체들에게 똑같은 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에서는 샤이바 철학과 분명히 모순된다.
다른 말로, 똑같은 사물을 보는 둘 이상의 주체(관객)는 〈똑같은 정신적 조건〉에 있다. 즉 그들은 〈단일한 아는 주체〉를 형성한다.¹ 웃팔라데바는 말한다.
“다수의 주체가 주어진 한 사물(항아리)을 똑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알아채고 있다. 그때 이 사물에 대해, 그들은 단일성(單一性)을 형성하고 있다.”

“의식(意識)”이란 하늘은 나누어져 있지 않다. 그 하늘을 떠도는 “생각의 구름”이 나누어져 있다.
〈이런 것〉을 경험한 이들이 이른바 전등(傳燈)을 하고 또 교회(에클레시아)로 모였던 것이다.
물론 이 단일성의 상태는 영구적이지 않다. 어떤 지점에서, 〈(유일한) “나”를 이루었던, 제한된 여러 “나(에고)들”〉은 다시 그들 자신으로 흩어진다. 이 연합과 분리에 책임 있는 요소는 주(主) 즉 의식의 절대 자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단일성의 상태는 여러 가지로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나는데, 축제(祝祭)를 즐길 때나 종교적 의식(儀式)에서는 분명하다.¹ 그런 때는 모두가 다함께 축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모임에서는 〈어떤 한 사람의 자아〉와 〈다른 사람들의 자아〉의 구별은² 그 의식 동안은 존재하기를 멈추고, 그들 너머로, 어떤 〈정신적 단일성〉, 정확하게 〈선행하는 분리된 개체성보다 더 강력하고 유일한 어떤 주체〉가 실현된다.

1. 뱀과 얼나 이야기와 탄트라 사라에서 쿨라-야가로 다루었다.
2. 몸과 마음 등이 다른 것 때문이다.

아비나바굽타는 탄트라 알로카(28:373-79)에서 말한다.
“의식(意識)은 모든 것을 구성하고 활성화하는데, 몸이 다른 것 때문에 〈수축의 상태〉로 들어간다. 그러나 대중적인 축제에서 그것은 〈확장의 상태〉로 돌아간다. - 모든 구성원이 서로 안에서 반영되기 때문이다. 축제의 분출로 (얼굴에 나타나는) 의식의 빛남은 (저절로 쏟아내는 경향으로) 마치 많은 거울처럼, 동참한 모든 사람의 의식에 반영된다.
이것으로 흥분되어(in-flamed, 그 불길 안에서) 어떤 노력도 없이 개인의 수축된 상태는 파기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춤, 가수의 공연 등 많은 사람의 모임에서 모든 구경꾼이 그 광경과 동일시될 때, 가득 찬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분리된 것으로 여겨지던 의식은 본래가 지복으로 되어 있어, 이런 환경에서 〈단일성의 상태〉를 얻어 〈완전하고 완벽한 지복의 상태〉로 들어간다. 질투, 부러움 등 위축이 되는 원인이 없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서 의식은 장애물이 없는 확장의 상태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지복에 의해 편재(遍在)하게 된다.
반면에 참가자 중 하나라도 바라보는 그 광경에 집중하지 못할 때, 다른 관객들이 용해되어 있는 의식의 형태를 나누어 가질 수 없고, 마치 〈고르지 못한 물건의 표면에는 잘 닿지 못하는 것처럼〉 이 의식은 방해를 받는다.
이것이 탄트라에서 쿨라-야가 등의 축제에서 〈그 축제와 동일시되지 못해 축제하는 이들의 의식의 상태를 나눠가질 수 없는 이〉는 입장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다. 실제로 이런 것은 다른 이의 의식의 수축도 일으킬 것이다.¹”

1.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 상태의 모임〉에서도 〈그런 이유로〉 분위기가 깨지는 것은 자주 경험하는 일이다. 그래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하는가? 주역(周易)은 충고한다.

方以類聚 物以群分(방이유취 물이군분)

“(영적 수준이) 다른 곳에는 사는 무리도 달라
각기 〈다른 세계(천국, 지옥 등)〉를 이루나니”

이것은 다시 어떤 문제에 놓이는데, 미적 경험과 신비적 경험의 관계다. 밧타 나야카는 그것을 같은 것으로 보았으나 아비나바굽타는 나야카의 견해를 수용하면서도 신비적 의식의 상태를 미적 의식의 상태와 분리하는 경계선을 명확히 한다.
그는 종교적 경험이란 〈모든 극단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 〈신(神, 의식)의 용해하는 그 불 속으로 모든 이분법적인 것들의 용해〉라고 말한다. 해와 달, 낮과 밤, 선과 악은 의식의 맹렬한 불길 속에 타버린다. “나”와 “내 것”이라는 매듭(결절)은 그 안에서 완전히 해체된다. 그리고 요기는 이분법적 사고 저 너머로, 그의 의식의 단단한 독존(獨存) 즉 카이발야에 분리되어(즉, 거룩하게) 남는다.

그러나 〈미적 경험〉에서는 일상생활의 감정들과 요소들은 그것들이 변형되더라도 항상 현존한다. 하지만 미적 경험은, 일상의 의식과 구별되는 고유하고 환원될 수 없는 성격 때문에, 산만한 질서의 것은 아니다.
반면에 〈미적 의식〉은 내용에 있어서는, 〈모든 개인적 관계에서 자유로운, 즉 정화(카타르시스)된 일상생활〉일 뿐이고, 다른 형태의 이분법적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예술은 삶(생활)의 부재가 아니라 - 삶의 모든 요소는 미적 경험으로 나타난다. - 〈모든 열정에서 진정되고 또 분리된 삶 그 자체〉이다.
--- p.136-143

〈 5 〉 밧다 나야카의 견해

밧타 나야카는 라사가 〈인식되는(프라티) 것〉도, 〈산출되는(웃파드) 것〉도, 〈현현되는(아비뱌즈, 즉 나타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만약 그것이 정말 자신 안에 현존하는 것으로 관객에게 인식된다면, 연민의 라사에서 그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1.
〈그런 인식〉은 논리적이지 못한데, ① 시타 등은 (관객과 관련해) 결정요인의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고2, ② (시타를 바라보는 동안) 관객의 의식에 그 자신의 연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고3, ③ 신성 등(의 재현)은 (미적 경험에서 요구되는) 〈보편성의 상태〉를 (관객에게서) 논리적으로 불러일으킬 수가 없기 때문이고4, ④ 〈바다를 가로지르는 것〉 등도 (비범한 사건이므로) 보편성(사다란야)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5

1. 그러니 〈연민의 주제(슬픔)〉에 대한 연극은 아무도 더 이상 보러가지 않을 것이다.
2. 관객은 라마가 아니다. 그래서 시타의 운명이 그들의 경우에서 결정요인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 똑같은 시간에, 〈시타의 이미지〉와 〈그 자신의 연인의 이미지〉의 동일시가 없다.
4. 여기에서 밧타 나야카는 결정요인 등이 신성 등일 때, 그것들은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신들의 행위는 (인간의 일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5. 이 주장은 아비나바굽타가 틀렸다고 입증했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과 그 이후에서)

〈관객이 이전의 그런 경험을 전혀 갖지 않은 한〉, 일어나는 바가 단순히 〈이러저런 특질(영웅심 등)을 부여받은, 라마의 기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가 증언(샤브다), 추론(아누마나) 등을 통해 인식된다고 하더라도, 마치 라사가 〈직접적 지식〉을 통해 인식되는 어떤 사물에 의해 일어나지 않듯이, 논리적으로 관객에게 라사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1.

1. 만약 라사가 단순한 추론으로 일어난다면, 〈직접적 인식(지각)〉으로부터는 더 많은 것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한 쌍의 연인들이 결합하고 있는 모습에서, 현존하는 누군가의 마음은 오히려 (부끄러움, 혐오감, 부러움 등) 갈등하는 감정의 먹잇감이 된다. 그런 장면에서 관객이 〈라사의 상태〉에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반면에 라사가 제삼자에게 현존하는 것으로 인식된다고 상정한다면, 관객은 〈무관심의 상태〉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인식이 〈직접적 경험〉의 형태이든 기억의 형태이든, 라사가 인식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똑같은 잘못이 라사는 산출된다고 주장하는 논지에도 돌려질 것이다. 만약 라사가 잠재적인 형태로 선재(先在)하고 나중에 나타난다고 한다면, 그러면 결정요인은 반드시 조금씩 그것을 비추어야 한다.1

1. 〈“스포타”의 개념에 대한 불교와 미망사의 반론〉은 mutatis mutantis(변경을 변경하여) 반복된다. (사전적 의미는 일단 ‘터짐, 열림, 분출’이다.)문법학파에 따르면 그것은 〈영원하고, 부분이 없고, 문자(음소)와는 구별되는〉 ‘Vocality’ 즉 ‘원초적(?) 음(音)’으로, 이 ‘영원한 소리’는 〈의미의 인식〉을 일으킨다고 한다.
[참고로 바르트리하리는 스포타를 세 가지 수준에서 논의한다. 바르나(음절)-스포타, 파다(단어)-스포타, 바캬(문장)-스포타. “원초적(?) 음”이라니 파쉬얀티의 무엇인 것도 같은데, 아비나바굽타는 〈스포타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여튼]
이 반론은 다음과 같다. 스포타는 말의 첫 번째 문자에서 전체적으로 현현되는가? 아닌가?
① 만약 스포타가 전체적으로 현현된다면, 뒤에 오는 문자는 불필요하다. 즉 첫 번째 문자가 세계 전체의 의미를 인식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② 만약 스포타가 점진적으로 현현된다면, 그때 그것은 〈부분 없이〉는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대안은 스포타의 성격에 모순이다. 똑같은 논리를 나야카는 〈라사〉와 〈(말로써) 라사가 현현된 그 ‘말’〉에 적용한 것이다.
라사의 이 점진적인 현현은 샹쿠카에 의해서도 비판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닥친 난관도 생길 것이다. 즉 〈라사는 정말로 우리 자신 안에 현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가? 아니면 제삼자 안에 현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가?〉 그래서 우리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라사는 〈시와 연극에서 말로 떠맡은 특별한 힘〉, 〈계시(啓示)의 힘(바와나)〉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명시적 의미(아비다)의 힘〉과는 다르고, 결정요인 등을 보편화하는 행위로 구성된다. 이 힘은 우리의 의식을 채우고 있는 〈정신적 혼돈(모하)의 두꺼운 층〉을 헤치는 기능을 가진다. 시에서 그것은 〈결점(도샤)이 없는 것〉과 〈특성(구나), 장식(알람카라)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극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재현이 특징이다.

시의 고전적 정의 중 하나는 이렇다. “시는 말이고, 결점 없는 만족이고, 특성과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장식을 갖는다.”

이 힘으로 드러난 라사는, 그다음 (직접적 경험, 기억 등과는 다른) 〈일종의 즐거움(보가)〉으로 즐겨진다.
삿트와, 라자스, 타마스 간의 서로 다른 형태의 접촉 때문에,1 〈이 즐거움〉은 유연성(드루티), 확대(비스타라), 확장(비카샤)의 상태를 구성하고,
삿트와의 출현 상태에 기인한, 자신의 의식(삼빗) 안에서 쉼(비슈란티)이 특징이고,
지복(아난다)과 빛(프라카샤)으로 편만하고,2
또 〈지고의 브라흐만〉을 맛보는 일(아스와다)과 유사하다.3

1. 〈자아(自我)의 빛〉 즉 〈의식(意識)의 빛〉은, 삼사리카의 존재계 안에서는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순수〉로는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정신적 기질(基質)인 붓디〉의 다음 세 가지 구성요소로 조건화된다.
① 빛이고, 빛나고, 즐거운 삿트와
② 움직이고, 역동적이고, 고통스런 라자스
③ 활기 없고, 막혀 있고, 우둔한 타마스
세 가지 구나의 개념은 상키야와 요가 학파에 속하는데, 별다른 수정 없이 인도의 학파 전체가 받아들이고 있다. 세 가지 구나는 각자가 고립된 상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비율로 섞여 있다.
삿트와 요소의 출현은 맑고, 거울 같고, 현현과 일치하고, 항상 분명하고 명확하고, 자기에 고유한 빛과 지복이다. - 이것들은 정말로 삿트와 안에서 그들 자신을 반영한다. 이슈와라-프라탸비갸-비브리티-비마르쉬니에서 아비나바굽타는 말한다.
“삿트와는 빛으로 되어 있고 깨끗한 공간과 같은데, 장애의 원리인 타마스의 구름의 이불로 완전히 가리어진다. 라자스는 행위로 되어 있고 활동으로 가득한데, 바람으로 조금씩 타마스의 구름의 둑을 털어내고 소멸시킨다.”

삿트와, 라자스, 타마스는 각각 의식의 세 가지 상태와 관련된다.
1. 삿트와는 비카사(확장)에 현저하고
2. 타마스는 비스타라(팽창)에 현저하고
3. 라자스는 드루티(유동)에 현저하다.
마니캬-찬드라는 말한다.
“결실이 실현되는 것은 삿트와가 비카사(확장)에, 타마스가 비스타라(팽창)에, 또 라자스가 드루티(유동)에 있을 때이다.”
후기의 이론가들은 비카사, 비스타라, 드루티를 각각의 라사와 연결한다.
① 비카사(확장)는 하샤(웃음), 아드부타(경탄), 바야나카(공포)의 의식에
② 비스타라(팽창)는 비라(영웅), 라우드라(분노), 비밧사(혐오)의 의식에
③ 드루티(유동)는 슈링가라(사랑), 카루나(연민), 샨타(평온)의 의식에 적절한 상태이다.

2. 사히탸-다르파나에서 비슈바나타가 말한 미적 경험에 대한 유명한 정의는 아비나바굽타와 밧타 나야카의 개념에 아무것도 더하지 못한다.
“라사는 〈세련된 이들(예를 들어, 예술의 이유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삿트와의 출현 덕에 맛보게 된다. 그것은 〈완전한 지성〉, 지복, 〈자신을 아는 일〉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다른 〈알 수 있는 대상〉과의 접촉은 없고, 브라흐만을 맛보는 일의 쌍둥이 형제이다. 그것은 비-보통적인 성격의 차맛카라로 활성화된다. 그것은 불가분성(不可分性)에서, 마치 〈우리의 바로 그 존재〉처럼 맛보게 된다.”
--- p.199-205

이제 이 〈나가며〉를 나가려는 순간, 필자는 처음 〈들어가며〉라는 산에서 울렸던 그 작은 메아리를 다시 듣는다.

일찍이 이탈리아의 〈단테(“사슴”) 알리기에리〉가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말했던, 그리스의 저 파르나소스 산에서 그 옛날 그 〈두 봉우리〉를 울려 퍼졌던 그 소리는 이탈리아 반도의 움베르토 에코(Eco, “메아리”)의 〈미의 역사〉에서 작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더니, 이제 그 메아리의 메아리가 한반도의 우리네 〈두개(頭蓋)의 봉우리〉에도 울려 퍼질 수 있다. (〈좌우 뇌의 활성〉 말이다.)

그 〈태초의 소리〉는 이것이었다.

“가장 올바른 것이 가장 아름답다!”

그 태초의 소리의 계시를 따라 〈아름다운 것〉과 〈가장 아름다운 것〉 즉 숭고미(崇高美), 그리고 〈올바른 것〉과 〈가장 올바른 것〉 즉 진리(眞理)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실제로 〈가장 올바른 것〉은 좌뇌의 관할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우뇌의 관할이다.

이런 것을 성경에서는 〈천지 창조의 찬가〉에서는 거듭거듭 노래한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God saw that it was good.”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自己)-만족〉 혹은 〈참나 안에서의 쉼〉일 것이다.
그 옛날 아비나바굽타(“새로운 그 무엇”)가 말한 〈“맛보는 일”의 비밀〉을, 다행하게도 이탈리아의 〈“뇰리”가 맛본 것〉을 통해 〈숭고미의 미학(味學)〉이라는 〈맛보는 “놀이(a Play)”〉에서 어쩌면 약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네 “삶은 한 편의 연극(a Play)”일지니.
거룩한 책(“聖經”)은 간곡히 권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리고 “여호와”라는 것은……
(그것은 〈들어가며〉에서 분명하게 밝혔지만, 소위 〈기독교의 신〉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필자는 단지 〈기독교 용어〉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영어로 말하는 것이 영국인을 위한 게 아니 듯.)

아는 자(“先知者”)들은 끊임없이 외친다.

“너희는 여호와(즉 의식, 참나)를 알라!”
“우리가 여호와(곧 삶, 존재)를 알자.
힘써 여호와(혹 진리, 자유)를 알자!”



뇰리의 『The Aesthetic Experience According to Abhinavagupta』가 어떤 경로를 통해 필자가 처음 읽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아마도 몇 년 전 우연히 〈美的 體驗論에 관한 硏究 - 아비나바굽타의 샨타-라사論과 체.게. 융의 自己實現說의 比較를 中心으로〉라는 어떤 논문을 읽으면서가 아닐까 한다. 아니면 다른 것일지도….
아무튼 이 책의 출판을 앞두고, 위 논문을 다시 읽었다. 〈미학(美學)에 관한 것〉은 평가할 입장이 아니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인도(印度) 미학〉과 〈융의 自己實現〉을 소개하고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보기 드문 논문이다. ‘서로의 향기(相馨)’라….]

그러나 이제 무언가 희미하게 짚이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이 거울 속에서, 〈돌과 즈믐 이야기〉를 해보려다가 〈이슈와라 프라탸비갸〉를 통해 참 나 자신을 더 통찰한 다음, 웃팔라데바의 〈하나님 찬양〉을 만끽하고 그와 아비나바굽타의 〈참맛을 찾아〉 맛보라는, 차맛카라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이 책은 그런 책을 통해 더 깊게 읽을 수 있다. 〈내 자신이 깊어진 만큼〉 더 많은 것이 보이니까 말이다.
그러면 성경은 당연히 이렇게 개작(改作)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더 깊이 맛보아 알지어다!”
--- 「나가면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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