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제3대 황제였던 영락제永樂帝(재위 1402~1424), 영락제의 손자이자 제5대 황제 선덕제宣德帝(재위 1425~1435)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문서로 남기는 것을 꺼렸다. 자신의 명령이 썩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을 비난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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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에는 선덕제가 조선에 “사냥개와 매를 당장 잡아서 보내라”고 요구하는 문서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명선종실록明宣宗實錄』은 같은 문서를 두고 “사냥개와 매 같은 것은 보내지 말라”고 인용하였다. 그리고 이 일화는 선덕제의 근검한 품성, 오랑캐들까지 사랑하는 인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두고두고 기억되었다. 거짓말로 지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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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명의의 문서는 명령 대상과 내용에 따라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천하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직군職群의 사람들, 때로는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 대체로 전자를 조詔, 후자를 칙勅(?)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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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스스로 찬술한 조서도 여럿 있었다. 당시의 용어로는 이를 수조手詔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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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자신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공공연히 큰소리치고 있다. 가장 의례적이고 ‘외교적인’ 언설을 담는 외교문서 …… 치고는 대단히 이례적인, 비정상적인 내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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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이란 명나라 2품 이상 고위 관부 사이에서 사용했던 평행문서인데, 외국의 군주와 주고받는 외교문서의 서식으로도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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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여러 편 실려 있는, 일반적인 한문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백화체의 선유성지가 그것이다. 선유성지란 …… 황제의 발언을 그대로 받아 적은 어록, 녹취록인데, 그것을 별도의 가공 없이 고려에 전달한 것이다
--- p.57
황제의 의사가 …… 구두 메시지로 전달되는 경로를 …… 사료에서는 이를 ‘구선口宣’이라고 표현하였다
--- p.66
그의 재위 기간 22년 동안 명 조정에서는 조선에 총 40번의 사신을 파견하여 연평균 1.8회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명 대 전체 연평균 0.6회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었다. 이때는 조선 태종 대 거의 전 시기와 세종 초년에 걸쳐 있는데, 그 기간에 조선에서 명에 파견한 사신도 연평균 7.6회에 이르러 전체 평균 4.6회보다 훨씬 빈번하였다
--- p.84
황엄黃儼이 총 11차례, 해수海壽와 한첩목아韓帖木兒가 각각 7차례, 기원奇原과 정승鄭昇이 각각 3차례 등 몇몇 환관들은 반복해서 조선을 찾으며 황제의 입 구실을 하였다. 이들 환관 사신들은 공식적인 의례의 장에서 황제 명의의 조서나 칙서를 전달하는 외에도, 연회 자리에서, 혹은 국왕을 따로 면담한 자리에서 황제의 내밀한 요구를 내놓았다
--- p.92
황엄이 구두로 성지를 선포하였다. “작년에 너희가 여기로 보낸 여자들은 뚱뚱한 건 뚱뚱하고, 피부가 안 좋은 건 안 좋고, 키가 작은 건 작아서 모두 별로 예쁘지 않다. 다만 너희 국왕이 공경하는 마음이 무거운 것을 보아 비妃로 봉할 것은 비로 봉하고, 미인으로 봉할 것은 미인으로 봉하고, 소용昭容으로 봉할 것은 소용으로 봉하여 모두 봉하였다. 왕은 지금 찾아놓은 여자가 있거든 많으면 두 명, 적으면 한 명이라도 다시 보내라.”
--- p.108
황제는 그런 처녀를 더 데려오라면서 또다시 황엄을 서울로 보냈다. …… 이때 명측에서, 조선에서 공식적인 명목으로 내세운 약재 구입 요청에 대해서는 역시 예부 명의의 자문을 통해 답변을 내리고, 실제 이유였던 공녀 건에 대해서는 사신 황엄의 입을 통해 또다시 보내라는 뜻을 전하였다. …… “조관들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 p.111
구두로 전달된 성지 가운데는 황제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물품, 혹은 사람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여성을 보내라는 요구였고, 이외에도 화자를 보내오라거나, 불경을 필사할 종이, 부처님 사리 등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 황제의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는 데에 환관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심부름꾼이었다
--- p.112
환관 사신들은 …… 명 궁정에 보낼 처녀를 선발하는 데 관여하며 국왕이 직접 심사장에 모습을 드러내길 요구하기도 했고, 동불상이나 부처의 사리를 걷어가기 위해 전국을 헤집고 다니기도 하였다. 심지어 황엄은 불상을 가지고 와서는 국왕에게 절하기를 요구하여 태종을 진노하게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들은 조선 조정에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 그것을 쌓아둘 창고를 지어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며, 그것을 사적으로 매매하여 이문을 남기려고도 했다
--- p.113
황제가 원민생에게 말하였다. “…… 짐이 늙어서 입맛이 없으니 밴댕이젓이나 곤쟁이젓, 문어 같은 것을 좀 가지고 와라. ……” 내관 해수가 황제 곁에 서 있다가 원민생에게 말하였다. “처녀 두 명을 바치라.” 황제가 기뻐하면서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아울러 스무 살 이상 서른 살 이하로 음식 잘하고 술 잘 빚는 시비 대여섯도 뽑아서 보내라.”
--- p.126
세종은 “지금 칙서의 말이 고아를 놀리는 것 같다. 언제 황제가 이렇게까지 한 적이 있었는가!”라며 분개하기도 하고, 이례적으로 선덕제를 가리켜 ‘멍청한 임금[不明之君]’이라고 욕하는가 하면, 당시 명의 정치 상황을 두고 환관들이 득세하고 있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 p.138
선덕제가 보낸 칙서 가운데에는 국가적 사안에 관한 내용도 많이 담겨 있었다. 말이나 소를 무역할 것을 제의한다든지, 여진에 잡혀갔다 도망쳐 온 중국인들을 돌려보내 달라는 등의 내용도 담겨 있었다. …… 조선과 여진 양쪽이 모두 명나라에 호소하며 자기편을 들어달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선덕제는 양쪽 모두에게 화해할 것을 권유하는 점잖은 내용의 문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 p.147
선덕제는 거침이 없었다. …… 뿐만 아니라 요리를 잘하는 여자를 뽑아서 보내달라고도 했는데, 심지어는 그녀들에게 두부 만드는 법을 익히게 하라는, 아주 자질구레한 요청을 담기도 했다
--- p.148
선덕 원년(1426, 세종 8) 3월에 서울에 온 사신 윤봉은 …… 칙서 전달을 마친 직후 새 황제의 첫 번째 성지를 전하였다. “너는 조선국에 가서 왕에게 말해 나이 어린 여자를 뽑아다가 내년 봄에 데리고 오라고 하라”, “밥을 잘 짓는 여종을 가려 뽑아서 진헌하라”는 것이었다. …… 상복도 벗기 전에 새 황제가 조선의 공녀를 탐하다니, 명 조정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비등할 법도 했으나 그럴 걱정은 없었다. 황제의 명령은 밖으로 새나갈 일 없는 ‘밀지密旨’였다
--- p.151
이때 사신 창성이 제시한 요구 목록에는 어린 화자 8명, 가무를 할 줄 아는 여자아이 5명, 디저트를 만들 줄 아는 성인 여자 20명 외에도 소주, 잣술[松子酒], 석등잔, 큰 개 50마리, 각종 매에다 여러 종류의 해물과 젓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 p.152
변계량이 …… 내관들이 구두로 전한 말에 따라 매와 개, 처녀 등을 바칠 때에도 문서상에는 모두 성지에 따른 것이라고 적시한다면 이러한 요구를 공공연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 p.158
영락~선덕 연간을 종합하면 중앙정부에서 서울에 파견된 사신 49회 가운데 46회, 94퍼센트의 사신단에 환관이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 p.187
세종은 그해 10월, 당시 서울에 와있던 사신 윤봉에게 …… 당시 명 조정에서 한창 추진 중이던 소 무역을 중단시켜 달라는 조선의 청원을 윤봉의 입을 빌려 황제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세종이 “무엇으로써 그를 달래야겠는가?”라고 물은 데 대해 황희가 답한 대로, 윤봉에게 은밀히 마포 70필을 건넸다. 윤봉은 자신이 돌아가서 조선에 소가 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해보겠노라고 큰소리를 쳤다
--- p.190
정통제는 즉위 조서와 함께 내린 칙서에서 과거 부황이 사람과 물건을 요구했던 것을 일체 중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아울러 그다음 달에는 과거 조선에서 보냈던 여종 9명, 창가비唱歌婢 7명, 집찬비執饌婢 37명 등을 모두 돌려보냈다
---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