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한국 지식계에 중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며 소개된 ‘생명권력’ 혹은 ‘생명정치’의 관점(카를 슈미트,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미셸 푸코, 조르조 아감벤 등이 이 새로운 권력이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름들이다)에서 볼 때, ‘산업화’와 ‘개발독재’란 말은 재정의되어야 할 소지가 다분해 보인다. 이 시대가 아감벤이 말하는 소위 ‘항상적 예외상태’의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1960~70년대 한국의 정치 상황을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재고해보고자 한다.
---「한국의 1960~70년대와 생명정치」중에서
19세기의 위대한 모더니스트들에게서 보이는 생산과 파괴의 변증법, 즉 ‘둘 다/모두’의 태도는 20세기에 이르면 ‘둘 중 하나/또는’의 태도에 의해 대체된다. 근대는 지독한 부정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분별없는 찬양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전자의 태도야말로 김광식, 김동립, 남정현의 소설이 공히 취하고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제 시작되고 있는 사이비 파우스트의 시대 초입에서 그것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병리적일 정도로 격렬하게 부정할 뿐 그것이 가져다줄 비극적 풍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근대에 대한 파우스트의 양가적 태도, 그 비극적 풍모가 그들에게는 부재한다.
---「파우스트의 시대─ 김광식·김동립·남정현·박태순·김정한 소설 재론」중에서
남정현 소설에서 에이런 유형의 인물들은 대개가 무위도식자이거나, 현실부적응자,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로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잃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관계로 이들 유형의 인물들에게서는 안전이나 위생에 대한 불안과 강박증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 그들에게는 이 땅이 총체적으로 부정적이기만 한 관계로 대한민국이 아니면 어디가 되었건 떠나기를 바라마지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증상이 가급적 현재의 공간을 유지하고, 지키고, 보존하고자 하는 알라존들의 안전강박증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는 점이다. 기득권층에 속하는 알라존 유형의 인물들이 과장되게, 신경증적으로 현상태를 유지하고자 함으로써 풍자의 대상이 되는 반면 이들 가진 것 없는 에이런 유형 인물들은 하나같이 현상태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풍자와 정신병리─ 남정현 소설에 나타난 정신병리」중에서
이른바 ‘규율권력’이 주권 권력을 제치고 권력의 지배소 자리를 점유하던 시기에 정신의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등장한 것은 따라서 우연이 아니다. 정신의학은 의학의 이름으로 개인의 신체에 규율을 부과할 권리를 생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적인 것을 광기에 부과하는 추가적 권력”이 바로 정신의학이다. 이 말을 뒤집어도 무방한데, 실은 정신의학은 광기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광기를 생산하다.
---「풍자와 정신병리─ 남정현 소설에 나타난 정신병리와 권력의 테크놀로지」중에서
1960년 스무 살의 나이에 4·19혁명을 맞이했고, 다음 해 곧장 5·16의 좌절을 경험해야 했던 김승옥과 그의 세대 작가들이 부딪혀야 했던 첫번째 질문은, 아마도 ‘4·19냐 5·16이냐’라는 선택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도 역시 선택의 여지는 없었는데, 4·19는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고 5·16은 기나긴 군사 독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미 훼손된 4·19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고 개발독재는 이제 비가역적으로 성가를 올리기 시작했다.
---「강요당한 선택─ 김승옥의 1960년대 중·단편 소설 재론」중에서
물론 박정희 시절의 국가 권력이 오로지 주권권력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박정희는 초법적 주권자였을 ‘뿐만 아니라’ 온 국민을 같은 시간에 깨우고 같은 시간에 귀가시키고 비슷한 노래를 듣게 하고 비슷한 영화를 보면서 비슷한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를 유지하게 하려고 시도했던, 아주 촘촘한 규율권력의 수립자이기도 했다. 이 점이 1960~70년대 한국 사회의 권력이 가진 복합적이고 특수한 성격이기도 한데, 민도식이 불안에 가득 찬 눈으로 목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민도식의 해방─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연작에 나타난 권력의 양상」중에서
물론 이때의 ‘생물학적 단위 집단’이란 벌거벗은 생명체들의 덩어리로 환원된 집단, 곧 ‘인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주의 시대의 주권 권력이 “죽이거나 살게 놔두는” 권력이라면 근대 생명정치의 권력은 “살리거나 죽게 놔두는” 권력이다.
---「난민들의 문학사─ ‘광주 대단지 사건’과 생명정치 시대의 한국문학」중에서
푸코와 아감벤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1970년대는 그야말로 항상적인 예외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생명권력이 그 지배를 철저하게 관철시킨 전형적인 사례로 거론될 만하다. 그리고 최인호의 「견습환자」가 예견하고 경고한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사태였다. 그의 비극적 세계 인식은 이제 권력이 공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까지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리하여 권력의 바깥 같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 그로부터 비롯된다.
---「긴급조치 시대의 호모 사케르─ 최인호의 중·단편 소설 재론」중에서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 인간은 자기보존 본능의 노예다. 그럴 때 절대적 외부에서 들이닥치는 타자(사건, 이방인, 몫이 없는 자)를 환대하는 일은 바로 그 ‘자기임’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일에 내기를 거는 행위이다. 혹자는 이즈음의 한국 소설이 고통을 과장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에 대해 알리바이를 고안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실은 타자 윤리는 그런 식으로 자기 윤리를 동반한다. 타자를 환대할 수 없음의 고통이 자기 윤리의 기반이다.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을 찾아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 통치성」중에서
저 문장들이 묘사하고 있는 세계는 물론 아주 위생적인 세계다. 안전한 세계이고, 장수하는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오로지 살아 있는 것이 목적일 뿐(무미건조하게 오래 사는 것과 의미 있게 일찍 죽는 것 중 어떤 것이 나은 것인지도 의학이나 다른 학문에 의해 증명되지 않았다. 물론 삶의 ‘의미’란 것의 정체도 마찬가지다), 충동적인 모험도, 격렬한 사랑도, 얼마간의 부주의도 비난의 대상이 되는 세계일 것이다.
---「마스크 쓴 사회─ ‘코로나 19’ 시대에 대한 메모들」중에서
세월호 참사는 문학장 내외를 불문하고 거의 전 국민을 우울증 상태로 몰아넣은 집단적 트라우마였고,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이 나라의 얼마나 많은 여성이 일상적인 성추행과 성폭행 속에서 ‘PTSD’ 상태를 겪고 있는지를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이후로 한국문학은 이 문제에 무감할 수 없었다. 소설이 이제 PTSD를 앓아야 할 참이었고, 실제로 많은 문인이 바로 그런 상태로 글을 쓰고 시위에 참여하고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당사자들의 치유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여기에 더해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이 가속화되었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사회의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윤리’와 ‘정치적 올바름 ’ ‘정체성 정치’의 시대를 살고 있다.
---「PESD와 ICD」중에서
자본은 심기증을 먹고 산다. 그리고 먹이를 쉽게 놓아주는 것은 자본의 생리가 아니다.
---「심기증(Hypochondria) 시대」중에서
오늘날 한국은 참 이상한 나라다. 그리고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이상함’의 기원으로 1960~70년대가 소환되는 일이 잦다. 그 시절을 일컫는 이름은 제각각이다. 개발독재, 급속근대화, 한강의 기적, 군사독재 등등.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여겨왔고, 그래서 그 시절을 얼마간의 분노를 섞어 ‘극악한’ 한국식 천민자본주의의 시발점으로 여겨왔다. 그러다 푸코를 읽었고 그의 권력이론에 매료되었다. 그에게서 작금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어떤 전망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그 주변의 몇몇 ‘생명권력’론자들로부터 나는 작금의 세계를, 1960년대 이래의 한국 사회를 가장 세심하게 분석할 수 있는 어떤 이론적 가능성을 보기는 했다. 그렇다고 여기 실은 내 글들이 196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에 대해 탁월한 푸코주의적 통찰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면 어불성설이다. 내게는 그런 능력도 그럴 의사도 없다. 철들고 나서부터 오로지 문학과 함께 살았으니, 나는 그저 틈나는 대로 한국의 문학사를, 최근의 문학 작품들을 푸코와 그의 동료들이 가르쳐준 바에 따라 읽고, 몇 자씩 글로 남겼다.
---「마치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