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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 도착했다

낯선 곳에 도착했다

삶창시선-74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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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28*205*20mm
ISBN13 9788966551637
ISBN10 896655163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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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써지지 않는 날
누가 이기나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바닥에 앉아 있으려면
엉덩이가 아파서 방석을 찾았는데
요즘은 근육이 생겨 탱탱해졌다

마늘쪽 같은 엉덩이가 지나가면
눈길이 따라가는 이유를 알겠다
시는 엉덩이가 쓰는 것이라고
마감 날 머리를 쥐어뜯어도 안 나오던 것이
책상머리에서 오래 버텨준 엉덩이가
얼마나 옴지락거렸으면
마늘종 같은 시가 쭉 올라올까

물렁거리는 사랑은 싫다
찐한 사랑은 근육으로 뭉쳐진다고
마늘종 같은 시를 만든다
날것으로 고추장에 찍어 먹을 사랑
탱탱한 한 줄을 위하여
엉덩이는 쉬지 않고 꿈틀거린다
---「마늘쪽 엉덩이」중에서

이사 온 지 20년 넘었다
철제 현관문은 삐그덕거리고
화장실은 스위치를 두 번 눌러야 불이 들어온다
아침에 약을 먹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한나절이 지나자 몸이 나른해진다
약봉지를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약은 걸러도 할부금을 15년 동안 꼬박 지불했다
이웃집에서 문을 두들겼다
그러고 보니 초인종도 고장 났다
버섯을 땄는데 먹어보라고 건넨다
나도 이웃집 문을 두들겨보았다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초인종을 고치지 않기로 했다

대출금 연장을 위해 농협에 들렀다
주민등록 초본을 떼어 오라고 했다
집 주소가 나란히 찍혀 있다
셋방살이 전전하다 여섯 번째 주소지다
집이 낡았어도 다시 이사할 일 없어 다행이다
천천히 뜯어보니 모든 것이 낡아 있다
돌아누운 아내 등을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집이 흔들릴 것 같은 공명이 몸속으로 울렸다
오래된 집에서 늙어가는 부부는
집에 상처가 나지 않게
설렁줄을 당기며 산다
---「오래된 집」중에서

사랑도 병이다
죽음처럼 다가오는 것이어서
떠나간 자리가 도려내듯 아프다
상처가 덧나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는데
병에게 멀어지려 수행 길에 올랐다
길에서 도반을 만났다

도반은 이미 병색이 완연했다
독에 들면 독을 써야 해서
내 몸을 베어서 도반의 상처에 붙여놓았다
여기저기 상처가 깊어서
마지막 살점까지 다 발라서 붙였다

한시도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아
살며시 몸을 기대어 보았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함께 걸어온 길에 저녁노을이 닿았다
세상이 붉게 물들어 간다
---「상사화」중에서

호미 들고 설치는데 들꽃 한 송이 피었다
뽑아버릴까 하다가 손이 부끄러워 돌아서는데
어느새 벌이란 놈 달려들고
들풀은 목숨 내놓고 젖을 빨리고 있다
봄이라 여기저기 흐드러진 것이 꽃인데
밭 가운데 들꽃 한 송이 보고 찾아든 벌이나
들판에 풀어헤친 젖가슴이나
살아보자고 그러는 것이다
마침내 꽃이 지자
세상이 과묵해졌다
가끔 고추잠자리가 쉬었다 갈 뿐
깔깔대는 소리는 꽃과 함께 지고 말았다
꽃 피던 시절이 그리운 건
왁자지껄해야 세상 사는 맛이 난다는 거
모든 꽃은 한눈에 들어온다는 거
그러다가 젖이 마르면
날개를 내려놓고 쉰다는 거
마침내 들판이 조용해진다는 거
뿌리까지 삭아 없어져도
꽃이 진 자리에 봄마다
어김없이 꽃이 핀다는 거
다시 세상이 시끌벅적해진다는 거
---「꽃 진 자리」중에서

사무실 앞 소사나무가
단풍에 들어갔다
지난해보다 일주일 늦었다
시끄럽고 번잡한 곳에서
고요를 위해 절정에 오르고 있다
이렇게 고울 수가
소사나무 앞을 지나며
옷매무새를 고친다
나도 단풍에 들겠다
---「단풍들겠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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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서는 지금은 시간 저편으로 흘러간 사물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시를 쓴다. ‘그리움’이라는 말로는 채 표현될 수 없는 장소에서 그 사물들은 꿈틀대고 있다. (…) 시인이 그리워하는 사물이란 달리 말하면 시간을 견디고 끝내 살아남은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별이 쏟아지는 곳은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곳에 쉬이 가지 못하리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그곳에 가는 순간 별이 쏟아지는 기억은 더 이상 시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오홍진 (문힉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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