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마마의 용안에 수심이 가득하신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군요. 백성들도 글을 알아야 하는데, 한자가 너무 어려우니 깨우치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림으로 그린다 하더라도 효행의 내용을 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사옵니다. 일반 백성들만 우매한 것이 아니옵니다. 사가에 나가 살다 보니, 양반 가문이라 하더라도 한문을 모르는 아녀자들이 꽤 있사옵니다. 여자들에게 애써 글을 가르치려고 들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소녀는 여자들도 글을 깨우쳐 자식들을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린 자식들을 바르게 키우는 어머니의 소임 아니겠습니까?”
정의공주는 평소 생각하고 있던 바를 임금에게 말했다.
“옳은 말이다. 양반가에서 아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지. 자식 교육은 어머니의 책임 크다는 네 말이 과연 옳구나. 아녀자들과 일반 백성들도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이 있다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글을 알아야 마음의 눈을 뜨지 않겠느냐?”
--- pp.25~26
“예조에 부탁하여 도화서 화원들을 적극 참여케 할 것인 즉, 그대가 책임을 맡아 화원들을 데려다 쓰시게.”
설순은 곧 예조에 부탁을 했고, 안견은 도화서 화원들 중에서 최경과 안귀생을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시켰다. 이 작업은 3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1434년 드디어 《삼강행실도》가 완성되었다. 한문으로 된 이야기를 싣고, 이야기의 순서대로 그림을 배열하여 생동감 넘치게 표현했다. 특히 충신편의 경우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 장면을 다룬 그림이, 효자 편에서는 아름다운 산수(山水)의 그림이, 열녀 편에서는 집과 건축물의 구조를 표현한 그림이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수고들 했소. 이 책을 우매한 백성들에게 널리 배포하여 즐겨 읽도록 권하시오.”
임금은 글과 그림이 들어 있는 《삼강행실도》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내용 전개에 따라 그림을 차례로 살펴보던 임금은 우매한 백성들이 그림만 보고 얼마나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지 매우 걱정되었다. 이야기 자체가 한자로 되어 있으므로, 아무리 그림으로 자세히 보여주더라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느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 pp.33~34
“삼강행실도에 대해선 나도 알고 있네. 백성을 그만큼 위하는 것을 보면 과연 금상께선 성군이 되실 것이로세. 우리글을 만들어 불경을 쉽게 번역하겠다니, 나는 백번 찬성이네. 일단 조카는 가서 기다리시게. 내가 조만간 사람을 보내 신미 스님이 거처할 암자를 알아보도록 함세. 아무래도 궁궐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은신하기 쉬운 곳이라야 하겠지?”
효령대군은 그러더니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는 이 길로 신미 스님을 만나기 위해 속리산으로 갈 예정입니다. 그럼, 백부님만 믿고 산에서 내려가겠습니다.”
수양대군은 효령대군에게 큰절을 올리고 일어섰다.
--- p.61
수양대군이 갑자기 무학대사를 거론하는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무학대사의 제자가 함허당이고, 함허당의 제자가 승려 신미였다. 유학을 조선의 정신적 지주로 삼은 정도전의 후예들이 최만리를 위시한 집현전 수구파들이고 보면, 그들에게는 불교를 등에 업고 새롭게 등장한 신미야말로 대립각을 세울만한 인물이었다. 안평대군도 수양대군이 애써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대립을 들먹이는 데는 그러한 내력이 있음을 알기에 더 이상의 대화조차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만하면 자신이 집현전 분위기를 알리는 임무에 충실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p.96
“우리글 만드는 일에 적극 참여해달라는 뜻입니다. 물론 집현전 학사들이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보한재께서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집현전 학사들이 우리글 만드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유학의 중요성만 알지 백성의 고충을 모르고 하는 소립니다. 전하께서는 백성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우리글을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을 위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 바탕에서 나라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하는 일입니다. 명나라에게 책잡힐 것이 두려워 백성의 일을 등한시한다면, 이는 나라 국록을 먹는 관리로서 무책임한 일입니다. 보한재께서는 저들과 뜻을 달리한다는 말을 안평 아우에게 들었고, 그래서 우리 같이 입궐해 전하를 뵙고 우리글 만드는 일에 적극 동참토록 하자는 것이올시다.”
--- p.102
중국의 글자가 발음상 우리와 달라 이두로 표기하여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게 한 것이오나, 그것 역시 표기를 한자로 한 관계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사옵니다. 한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 이두를 배우기에는 어려움이 많사옵니다. 이번에 전하께서 우리글을 새롭게 만드시는 일은 백성을 사랑하는 하해와 같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옵니다. 전하의 마음이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어야만 나라가 발전할 수 있사옵니다. 백성 누구나 쉽게 깨우쳐 읽을 수 있는 우리글이 만들어진다면, 나라의 마음이 하나로 결합되어 큰 힘을 발휘하리라 생각하옵니다.”
--- pp.121~122
사람은 들숨과 날숨으로 숨을 쉬며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데, 소리는 날숨을 통해 허파에서 목구멍 밖으로 공기를 배출할 때 나왔다. 바로 날숨으로 소리를 낼 때 목이나 입안에서 혀가 입천장에 닿아 장애가 발생하면서 나는 발음이 바로 닿소리(자음)였다. 즉 기역(ㄱ), 니은(ㄴ), 미음(ㅁ), 시옷(ㅅ), 이응(ㅇ)의 기본 다섯 가지 자음을 만든 것이었다.
이 기본이 되는 다섯 가지 자음은 안견을 비롯한 도화서 화원들의 손재주를 빌려 입안의 발음 모양을 가지고 형태를 만들어나갔다. 여기에 처음부터 임금을 도와 우리글 만드는 일에 참여한 공주와 왕자들, 복천암에서 서신으로 주고받으며 돕는 승려 신미는 물론, 집현전 학사들까지도 적극 참여하여 화원들과 의견을 교환해가며 글자의 형태를 여러 차례 수정해 최종적으로 자음의 획을 결정한 것이다.
임금은 이 다섯 가지 기본 글자를 입으로 계속 발음해 보면서 각기 비슷한 소리가 나는 새로운 글자들을 만들어나갔다. 즉 ‘ㄱ’에 점을 하나 더 보태 ‘ㅋ’을 만들었다. ‘ㄴ’에서 점 하나를 더 보태 ‘ㄷ’을, 이 ‘ㄷ’에서 다시 점 하나를 더 보태 ‘ㅌ’을 만들었다. 또한 ‘ㅌ’에서 글자 모양이 비슷한 다른 글자인 ‘ㄹ’이 파생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ㅁ’에서는 ‘ㅂ’과 ‘ㅍ’이, ‘ㅅ’에서는 ‘ㅈ’과 ‘ㅊ’이, ‘ㅇ’에서는 ‘ㅎ’이 새로운 획으로 탄생하였다.
--- pp.13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