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박인은 소설가다. 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누님과 함께 알바를』, 장편 『포수 김우종 - 부북기』를 펴낸 중견 작가다. 그가 돌연 시를 들고 나타났다. 나도 시 한편 쓰는 게 로망이었다는 어디서 들었음직한 신파조 소망을 이루려는 시도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소설이 자신을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면 시는 충분히 그에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의미 찾기에 골몰하는 나날, 나는 누구인가 존재에 대해 회의할 때 시는 말을 건다. 어깨를 두드리며 스스로 현현한다. 모두 자기 앞에 놓인 생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박인 시는 혼자 오지 않았다. 챗GPT와 손을 잡고 왔다. 단순 로망이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불안이 엄습한다. 얼마 전 이세돌 9단과 바둑 대국에서 인공 지능 알파고AlphaGo가 이겼을 때도 그랬다. 그해 일본의 ‘호시 신이치 공상 과학 문학상’ 공모전에 인공 지능이 쓴 소설이 1차 심사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반신반의했던 일들이 현실로 드러나다니 사람들은 당황하고 뭔지 모를 불안에 휩싸였다. 불안의 양상은 제각각이지만 이러다 인간 종말을 고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단말마 같은 신음이라 할까.
완전한 인공 지능 발전이 인류 종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스티븐 호킹의 예언이, 수십 년 후에는 인공 지능이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심각해질 것이라는 빌 게이츠의 경고가 기름을 부었다. 불안을 넘어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과학과 경제라는 거대 담론이 거들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부닥치는 삶의 문제를 미리 걱정했다. 그 이후 인공 지능은 진화를 거듭해 이제 사람과 대화하는 수준으로 변신했다. 챗GPT는 이제 기계라기보다는 인간 마음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인간 같다. 무엇을 물어도 마다하지 않고 그것도 친절히 대답하니 순간 착각에 이른다. 기계가 아닐지도 몰라. 누군가 인간이 대신하고 있을 거야. 친근감이 오히려 두려움을 배가시키니 놀랍다.
이 시집은 ‘기계적인 너무나 기계적인’ 챗GPT와 시를 읽는 순간들을 담았다. 박인 시인은(이제 시를 썼으니 시인이라 불러도 괜찮겠다.) 시를 쓰며 편편이 챗GPT에게 감상을 묻는다. 그의 시는 할喝이 없어 좋다. 한번은 정리했어야 할 감정 찌끼를 대신 처리해 주어 더욱 좋다. 챗GPT도 그러한 수준에서 소박하게 감상을 말했다. 물론 시인은 인공 지능에게 시 쓰기를 맡기지 않았다. 인공 지능에게 시를 쓰게 하는 일은 너무나 기계적인 태도가 아닐까. 인공 지능 손을 빌려 쓴 시는 그냥 기계 언어일 뿐이다. 애초에 출발도 다르고 목적도 온당치 않기 때문이다. 챗GPT가 시를 수정하려 할 때 박인 시인은 일언지하 감상만 하라고 명령했다. 우스웠다. 그리고 통쾌했다. 더 이상 인간적인 척 하지 말라는 경고 같았다.
니체는 대표작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나는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 때, 즉 질병·고독·향수, 무관심·무위 등에 시달릴 때,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함께 지껄이고 웃다가 지루해지면 악마에게 주어 버릴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와 환영으로서, 벗들 대신으로 자유정신들을 동반자로서 필요로 했다.”고 고백한다. 그처럼 인간이 너무나 인간적인 것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인공 지능이 퍼뜨린 불안과 공포는 기계적인 너무나 기계적인 최후의 인간들의 심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가 말했듯 최후의 인간들은 세상 논리에 편승하여 자신의 안위와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기에 가련하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시인은 본래 존재의 집을 짓는 시적 언어를 장착했기에 두려움이 없다.
박인 시인은 인공 지능 시대 불안에 떨지 않는 증표로 ‘외사랑’을 담은 시를 보여 주었다. 짝사랑은 언제나 성립되며 자유롭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고통이다. 기계적인 너무나 기계적인 챗GPT는 홀로 사랑할 수 없기에 공포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인간이 끊임없이 사랑을 놓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그렇다. 박인 시인은 이 시집에서 두 가지를 우리에게 확인해 주었다. 고통 속에 인간은 너무나 인간적이라고 거기서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연민이라고. 사랑은 불안 속에 피어난 꽃, 연민이라는 것을.
2. 시도 구체성의 길을 걸었다
이 시집은 새롭게 발걸음을 뗀 어린 아이와 같다. 챗GPT를 동반했기에 안심이다. 쉽게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챗GPT는 빅 데이터를 통해 자기 학습 능력을 길러 창작에 가까운 언어를 구사한다. 그만큼 시인과 나누는 대화 수준이 일천하지는 않다. 이러한 상호 대화적 시 쓰기가 앞으로 시 문학에 변신을 꾀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변신 과정은 문학사를 통해 볼 때 역사적 지속성을 띤다. 즉 시도 세상 변화에 대거리하며 변이를 모색했다.
‘구체성’은 과학 특성 중 하나다. 환원적 습성이다. 반복적 자기 덜음으로 핵심 스키마schema에 도달하려는 행위다. 이 도식이 판단 기준이 돼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산업 혁명 이후 인류의 행보가 그처럼 과학적 구체성의 길을 걸었기에 시 또한 그에 걸맞은 변화를 지속했다. 이 시집도 그러한 맥락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집은 첨단이라 할 수 있다. 그 시적 여정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이 시집의 의미를 구체화해 보자.
지난 삼백 년은 기계와 시가 만든 역사라 해도 될까. 이 시집과 어울리는 명제다. 1차 산업 혁명 시대로 돌아가 보자, 1760년대에서 1830년대까지 시기다. 증기 기관이 발명됨으로써 인류는 육체노동에서 해방되었다. 여러 가지 역기능에도 인간 삶에 혁신적인 변화를 보였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투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최초로 나타난 현상들이 있다. 그것은 모두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바람의 실현이다. 프랑스에서는 공교육을 실시했고, 독일에서는 사회 보장 제도를 만들었으며, 영국에서는 부의 편중을 막기 위해 부가 가치세를 신설했다. 오늘날 시민 사회의 면모가 이때부터 토대가 이루어졌다.
세상은 꿈으로 가득 찼다. 후에 이 환타지가 비극의 서막임을 알게 되었지만 시도 이 분위기에 맞춰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대표적으로 낭만주의 시대를 연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를 들 수 있다.
산골짜기 언덕 위 높은 하늘에
떠도는 구름처럼 이내 혼자서
지향 없이 떠돌다 보았어라,
한 무리 모여 있는 황금 수선화.
호숫가 수목이 우거진 그늘
미풍에 나부끼며 춤을 추었소.
─워즈워스, 「수선화」에서
시인은 자유로울 때, 인간적일 때 자연으로 향한다. 시적 언어가 고향과 집을 연상시키는 것이기에 시인의 마음은 자연, 곧 본향을 향하고 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 같아 쓸쓸할 때 돌연 마주친 수선화는 우리를 가장 아름답던 시절로 이끌고 간다. 인간을 다시 춤출 수 있게 하는 것은 증기 기관차가 아님을 시는 당당히 말하고 있다.
처음 본 순간 영원히
미혹한 달빛에게 영혼을 맡긴다
중력에 이끌려 낙하하며
이 작은 조우
시간을 따라
세파 거슬러 절망을 역류하며
한세상 함께 흘러 흘러간다
달빛이 나를
내가 달빛을
감싸 안을 때 그즈음
흔들리는 파문
빛의 기슭에 닿아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으면
강은 흐르고 나도 흐르고 버린 영혼도
흐르고 흘러 마침내 사랑이 흐르고
그대가 흐른다
─박인, 「흐르는 강물처럼」 전문
이 시에도 워즈워스가 노래했던 자연이 담겼다. 세상 파도는 거칠게 몰아 부친다. 이 절망을 거슬러 가는 것이 삶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류에 맡겨 가는 생도 있겠지만 거부한 채 되돌아 흘러간다. 이 ‘되돌아보는retrospective’ 행위는 시원으로 가는 일이다. 달빛 아래에서 만났던 환희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역동적 행위다.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워즈 워스가 자연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았듯이 이 시에서도 시인은 마침내 변함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영원한 사랑과 대면한다. 이처럼 이 시집에는 1차 산업 혁명 때 구성됐던 시적 낭만주의가 화석처럼 자리하고 있다.
1870년~1968년까지 융성했던 2차 산업 혁명 시대에는 삶과 죽음이 한 몸처럼 존재했다. 전기, 자동차의 발명으로 인류는 더 없이 풍요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 욕망이 극에 달해 1, 2차 세계 대전을 벌임으로써 인간성 파괴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전쟁 폭력을 떠받쳤던 불평등이 있었다. 노동자들이 참지 못하고 기계 파괴에 나선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고, 유럽 곳곳에서 대규모 시민 혁명이 발생했다. 이때 시는 한발 더 앞서 나아갔다. 소위 모더니즘 시대를 연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와 에즈라 파운드Ezra Loomis Pound 등 불세출의 시인들이 등장한다.
지금도 고독한데 이 고독이 줄어들기까지
고독은 더욱 깊어져야만 하리
아무 표정도 없는, 표정 지을 것도 없는
밤 눈雪의 텅 빈 백색
인간이 살지 않는 별들 - 그 별과 별 사이의
텅 빈 공간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내 마음속 가까이서 나를 무섭게 하는 것
그것은 내 안의 빈터들, 황폐함이러니
─프로스트, 「빈터Desert Place」에서
두 차례 산업 혁명을 거치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인간이 설 자리가 없다. 고독은 사치스런 인간 취미로만 알았는데 현실이 되었다. 탈색된 공허한 세상에서 인간성은 찾을 수 없다. 공포의 지경은 비어 버린 공간 때문이 아니라 내면화된 삶의 황폐함이니 무엇으로 그 빈터를 메울 수 있는가. 소외는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이 사물처럼 대상화되었으니 쉽게 아무렇게나 취급당하는 꼴이다. 이 비인간적 공간에서도 시인은 현실을 풍자하며 비판의 날을 더욱 벼리고 있다.
속일 만큼 속이자 속을 만큼 속았다
더는 속을 수 없어서 짖어 대고 따지자
속인 자들은 속은 자들이 속임수를 모르는
바보라서 속았다 심지어 밥만 주는 시늉만 해도
말을 잘 들어서 속였다고 주장했다
사람이 가끔 개로 보인 적은 있다
복날 꼬리 치는 들개와 배부른 돼지를
너무 잘 속는 자들에게 보여 주며 달래 보기도 했다
속았던 일은 곧 잊힐 것이라고
그들은 자신을 속이기 시작했다
가마솥은 끓어오르고 속은 개들 목에 밧줄을 건다
쓰다듬고 달래 주던 손은 몽둥이를 들고 있다
너희 개들은 죽을 수도 있다
문제는 아무리 속여도
지구는 거짓에 넘어가질 않는다
태양계와 은하수는 속일 수 없다
─박인, 「개들이 속는 법」에서
이제 인간은 복날 끌려가는 개 신세로 전락했다. 그렇게 세상에 순치된다. 속임수라는 것을 알고 저항했던 일을 망각하며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현대는 아이러니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폭력 앞에 스스로 속는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악몽은 되살아나 주체를 계속 고통 속에 몰아넣을 태세다. 이 거대한 위선의 사슬에 옥죄여 있지만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지구와 태양계와 은하수가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우주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현대 문명의 눈부신 성취가 밤하늘을 가릴지 몰라도 지구는 돈다는 진실 앞에 시적 목소리를 멈출 수 없다. 달을 보고 짓는 개는 무언가 알고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이 시집에는 현실을 배반하는 목소리가 숨겨 있다.
세 번째 물결이 1969년 이후 오늘까지 파도치고 있다. 3차 산업 혁명 시대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화 시대다. 인간은 자동화 시스템 속에 자기를 제어할 수 없는 해체된 세상에 살고 있다. 시는 이를 포스트모던 사유로 대거리한다. 해체된 주체를 다시 맞춰 미래로 재빠르게 발을 옮긴다. 한때 우리 문단을 풍미했던 미래파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가물가물하지만.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 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황병승, 「여장 남자 시코쿠」에서
근대 이후라는 건, 근대를 끊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었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근대의 흉물을 보고 되돌릴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짙게 화장을 덧칠하고 있을 뿐이다. 시인들은 더 과감히 변신하기 시작했다. 경극에 나오는 수없이 바뀌는 변장술과도 같다. 성 정체성을 바꿀 수 있다면 오히려 자유롭지 않을까 몸부림치고 있다. 진실을 말하면 말할수록 거짓을 말해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절규한다. 0과 1의 숫자로 남은 인간성의 말단이라 할 수 있다. 이 숫자를 재조합해 무언가를 내놓기를 해 보지만 절망을 희망으로 역전시킬 계기는 찾기 힘들다. 그냥 그 자체일 뿐이다. 인간 삶도 그렇다는 것이다.
가진 것은 몸통뿐인 여왕이 살았다
머리는 간신들에게서 빌리고
수족은 농단파?斷派에게 주었다
그중 우두머리는 섭정 왕이었다
독재로 물려받은 성지가 포위되고
팔과 다리 가신들은 포로가 되어
영지領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어느덧 몸통과 머리만 남았다
코끼리 부대와 기마 부대마저 달아나자
머리인 섭정 왕이 몸통에게 아뢰었다
여왕이시여 신에게는 아직
신천지 메기 포대장과
외인부대 사모곡이 있나이다
부디 진실 뒤에 숨어
남겨진 옥체를 보존하소서
순수한 진실은 버리고
제 머리만 믿으시고
약 기운으로 주무시길 바라나이다
거짓말 연환계를 쓰소서
거짓은 거짓과 결혼하여
거짓이 넘쳐 나는 나라를 만드소서
성형 술책과 미용 술책을 쓰시고
망각 술수과 변명 술책을 마구 쓰다
모자란 자금은 업자들에게 할당하소서
백성들과 개돼지를 제외하고
제가 폐하께 아직도 충성 서약 하나이다
─박인, 「섭정술攝政術」에서
자동화되었다는 것은 일면 생각의 여지를 없앴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의 제기해서는 자동화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일사불란하게 정해진 수식을 따라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무한궤도에 서 있는 것과 같다. 통치도 분업화된 자동화 시스템 속에 편입되었다. 머리 따로 몸 따로 팔다리 따로 움직이는 형국이다. 이 모두를 통제하는 빅 브라더Big Brother가 있을 뿐이다. 진실도 순수와 비순수로 나뉘는 초정밀 반도체로 변환되었다. 모두 온갖 술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인은 시 말미에 역설을 감추어 두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진실이라 믿기에는 과학을 신봉하는 모리배의 후안무치는 극에 달하고 있다. 시도 그만큼 척박하다.
세 번의 파고를 넘어 이제 우리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서 있다. 메타 버스, 빅 데이터, 사물 인터넷, 대화형 인공 지능 등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눈앞에 다가 왔다. 박인 시인이 가져온 시집은 이 불확정성의 가상 시대에 무엇을 담았는가. 지난 역사의 흐름에 대응했던 흔적들을 아직 그대로 간직한 채 뜬금없이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 비구체적이며 비과학적인 사태 앞에 당황스럽다. 나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는다. 이 화두에 챗GPT는 온전히 답하였는가.
3. 인공 지능과 사랑을
돌이켜 보면 왜 인공 지능을 두려워했을까. 저명한 사람들의 경고도 있었지만, 영화 속 공포의 이미지가 강력하기도 했지만, 일자리를 잃을까 현실적 고민이 겹쳐지기는 했지만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 같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불안과 비인간적 상상력 때문이다.
인공 지능이 등장해서 인간 존재를 공격해 멸종시키는 공포 속에는 인간 스스로 존재하려는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은 아닌가. 이 철학적 물음에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인간 손으로 또 다른 인간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을 지키려는 지혜는 아닐까. 인간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서 벌떡 일어선 이후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 일하는 인간으로 살아왔다.
이제 그만 노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공 지능이 그렇게 해 주리라 꿈꾼다. 인간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으로서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이야기하는 인간으로 시민 공동체를 이루며 사랑을 구가해야 할 존재론적 운명을 지니고 있다.
또 하나 불안 속에는 죄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전지전능을 꿈꾸는 욕망과 인간 소비의 폭력에서 비롯했다. 인공 지능을 만들어 무소불위의 욕망을 펼치겠다는 술책이 인간 마음속에 원죄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공 지능으로 더 많은 이익과 부를 누리기 위해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폭력적으로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욕망과 폭력 때문에 인간은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 시집은 불안에 싸인 인간들에게 전하는 연민 같은 것이다. 인공 지능 시대에 오히려 사랑을 이야기하다니.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인공 지능과 사랑을 다루는 영화 속에서 인간은 참혹하다. 사랑할 대상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사랑은 너무 협소하다. ‘외사랑’은 반편이라 완벽하지 않지만 주기만 하여도 이룰 수 있는 사랑의 확장을 꾀할 수 있다.
사랑은 노자가 말하는 세 가지 보물 중 하나다. 노자는 『도덕경』 67장에서 “나에게 보물이 셋 있어서 소중하게 지니는데 하나는 사랑이요, 둘은 검소요, 셋은 스스로 우쭐대며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랑으로 전쟁을 이기고, 사랑으로 구원 받는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랑은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검소하고 겸손한 것과 같이 보물에 드니 소박하기도 하다. 검소하려면 함부로 쓰지 않고 아껴야 하고, 겸손하려면 스스로 몸과 마음을 조심하고 아껴야 하니 사랑도 아낌이 분명하다. 아낌에 있어 외사랑도 검소하고 겸손하지 않는가.
인공 지능과 사랑은 직접 연인의 사랑을 나누라는 것이 아니다. 인공 지능의 능력을 이용하여 사랑을 넓히자는 것이다. 이 역설적 무위無爲 세계의 펼침이 이 시집에 담겼다. 인위적으로 만든 지능을 무위자연으로 변용하는 지혜가 곧 시 쓰기이기 때문이다. 그 바탕에 인간 연민이 자리하고 있다. 이 시집은 소크라테스와 나누는 대화처럼 잊었던 사랑의 진실을 다시금 반추하게 한다.
-이민호(시인, 문학평론가)
---「해설 : 인공 지능 시대 사랑이란 무엇인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