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에서든 모든 사람의 사회적 권한이 동등할 수는 없으며, 차등적으로 갖게 되는 권한의 크기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가 달라진다. 문제는 가문· 혈통이나 종교·민족 등 개인의 출생 배경이 아니라 당사자의 후천적 노력으로 형성한 능력에 따라 사회적 권한 행사의 범위를 정하는 합리적 차등을 추구할 수 있느냐에 있다. 개인이 갖추고 있고 실제로 발휘하는 능력과 사회적 업적이 남다르기에 차등적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을 공공적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확인시켜 주는 사회적 공인기제가 존재하고 있어야 합리적 차등주의를 실제로 구현할 수 있다. 조선조의 과거제도가 바로 그런 사회적 공인기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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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정부 조직과 대강 비교해 본다면, 무과는 국방부 및 경찰청, 역과는 외교부, 의과는 보건복지부·질병관리청 및 국립의료원·국립대학병원·보건소, 천문학 음양과는 과학기술부 및 기상청, 지리학 음양과는 국토교통부, 명과학 음양과는 통계청, 율과는 법원과 법무부 및 검찰청, 산관 취재는 기획재정부 및 국세청, 화원·악공·악생 취재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정부 조직을 지휘하는 수장首長은 문과 급제자 출신이었다. 이를테면, 국방부장관(병조판서)이든 법무부장관·검찰청장(형조판서)이든 보건복지부장관(예조판서)이든 기획재정부장관·경제부총리(호조판서)든 무과나 율과·의과 급제 또는 산학 취재 출신이 아니라 문과 급제 출신이었다. 문민 통치의 전형을 이미 조선시대에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대·경찰 병력 및 무관이 문관의 지휘를 받는 사회가 있었다는 사실은 서양 사학자들이 몹시 의아해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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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가 등수만 결정하는 시험이었으므로, 광해군 시절(1611. 3) 전시 답안이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하라는 왕명이 내려졌으나 신하들이 거부한 일이 있었다. 임숙영(1576~1623)이라는 인물이 전시에서 책문策問 답안에 임금의 시정施政과 인사 및 언로의 소통 등에 문제가 있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쓴소리를 담은 건의를 했는데(맞아 죽을 각오로 글을 쓰노라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춘추』라는 경전을 인용하면서 나라와 정치가 바른 길에서 어긋나 있다고 비판한 것이 광해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이에 광해군은 임숙영을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으나, 신하들이 “이미 합격이 결정된 인원을 취소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왕의 명령을 거부하여, 3개월가량 왕과 신하 사이에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광해군이 합격 취소 명령을 거두었다. 조선은 왕이 독단적으로 전횡을 휘두를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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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제도가 갖는 핵심적 의의는, 혈통적 귀속 요인보다 성취적 업적 요인을 존중하는 사회 질서를 꾸준히 유지하도록 하는 사회적 힘을 마련해 주었다는 데에 있다. 조선조 사회가 동일한 정치체제와 사회구조, 문화적 성격을 500여 년 유지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500여 년의 역사가 지속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가능케 한 사회적 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회적 힘은 과거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고 교육제도와 연계되어 있다. 과거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조의 제도 교육은, 사구에서처럼 교육 행위가 신분 귀속적 특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학문을 닦을 자질이 있고 노력하는 한 개방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개방적 교육 구조를 유지하는 한편 과거 급제라는 유인 체제가 있었기에 유학에 대한 광범위한 교육인구가 있을 수 있었고, 성리학의 확산과 유교 윤리의 정착을 이룰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조선을 일컬어 ‘소중화’라는 별칭을 붙인 것은 부러움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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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대혁명 때에 국민의회에서 채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을 보면, “법 앞에 평등한 모든 시민은 본인의 능력에 따라 모든 위계와 모든 공직 및 직업에 나아갈 자격을 동등하게 가지며, 덕성과 재능에 따른 차별 이외의 차별을 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대혁명 이전에는 민족·종교·가문 등 불합리한 기준에 의해서 사회적 차별을 가하는 경우가 흔했지만, 앞으로는 이런 불합리한 기준에 의한 차별은 용인할 수 없고 덕성과 재능이라는 합리적 기준에 의한 차별만 인정된다는 선언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이런 지향점은 시민(조선조 사회에서는 천민을 제외한 백성)에게 국한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무조건적 평등주의의 선언이 아니라, 덕성과 재능에 따른 불평등만을 사회적으로 용인해야 한다는 합리적 차등주의의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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