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은 현대미술의 장치이자 조건이다. 즉 미술관은 대중에게 미술작품을 선보이는 공간적, 제도적 배경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현대미술을 규정하는 개념적 조건이기도 하다. 현대의 문화 관습에 익숙한 우리가 전자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미술관을 미술품 감상하러 가지 그럼 뭐 하러 가겠나. 그러나 후자라면, 미술관에 관한 얼마간의 논의가 필요하다. 즉 미술관을 단지 미술품의 전시 공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기능을 구현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해할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 p.13, 「미술관에 쌓인 모색들: 1986~현재」중에서
그러므로 오래된 미술관은 오히려 자유롭다.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들의 미술관 리모델링 프로젝트가 대대적으로 유행하고 있지만, 사실 낡은 공간을 잘 간직하는 건 오래된 미술관만의 특별한 권리다. 여타의 건축물과는 달리, 연륜 있는 미술관이 품은 시간성은 역사적 유산인 동시에 전복의 대상이 된다. (…) 가변적 공간 혹은 구조물들이 생겨났다 모습을 감추는 광경, 그 안에서의 사건이 만약 흥미롭다면 그건 이곳이 오래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일련의 과정이 시간과 공간,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이에서 예술적 진동을 만들어내고, 이곳은 제3의 공간을 찾는 이들의 런웨이이자 무대로 다시 삶을 살아낼 테니 말이다.
--- p.34, 「미술관 공간 경험의 진화: 사이에서 공명하는 제3의 공간」중에서
?TV 시계?(1963)나 ?달은 제일 오래된 TV?(1965), 혹은 ?TV 정원?과 같은 작업들이 웅변하듯이, 백남준이 구현한 것은 한때 지극히 인위적이었던 기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혹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즉 더 이상 독자적인 대상, 또는 형상(figure)으로 인지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배경(ground), 또는 환경(environment)이자 자연으로 변형되는 궤적”을 선취하는 것이다. 한때 ‘브라운관’이라 불리던 CRT 모니터들의 노화로 가동이 중단된 ?다다익선?은, 이렇게 ‘기계도 나이 든다’는 자연사적 의미에서 ‘기계의 풍화’를 ‘미리 기념’하는 (반)기념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p.64, 「폐허와 건설현장의 (반)기념비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시차적 당대성」중에서
아무튼 이렇게 미심쩍고 깔끔하지 않으며 균형도 맞지 않는 분석 기준에 따라 2012년 이후 10년간의 작업을 분석해 보니, 전체 491점 중 미술관이 관여한 작업은 256점으로 계산된다. 미술관이 관여하지 않은 미술 관련 작품은 108점, 기타 예술 관련 작품은 88점이며, 비예술 문화 영역 작업이 33점이다. 그리고 나머지 여섯 점이 ‘기타’에 속한다. 즉, 우리 작업에서 미술관과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으로 높다. 문화 영역 밖에서 이루어진 작업은 무시해도 좋으리만치 미미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미술관은 작업의 명줄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 p.100, 「그래픽 디자인에 들어온 미술관」중에서
미술관의 재가동에 대한 진단은 막연한 차원에 머물지 않고 미술관 운영과 관련한 실질적인 이슈를 던진다. 한국의 ‘현대’ 미술관 건축물이 점점 나이를 먹고 있는 지금 오래된 미술관 건축물의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새롭게 할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이나 아르코미술관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공립미술관들은 이제 건물의 수명으로는 완공 30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미술관이다. 한국에서 30년은 재건축이나 철거와 같이 건축물의 생사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리노베이션과 같은 물리적 재생을 고민하는 두 건물은 오늘날 미술관이 직면한 긴급한 이슈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 p.131, 「미술관의 돌봄을 위한 큐레이팅」중에서
루브르 박물관에서 방문객이 없는 동안 벌어진 리허설이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박물관 관람 시간 동안 매일같이 노동자로서 박물관의 돌봄 시스템에 기여하고 있지만 정작 예술로부터 소외돼 있는 직원들이 관객으로 등장함으로써 이뤄졌다. 이는 문화 산업이 착취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소외 문제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대개는 건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직원 출입구를 통해 출퇴근하던 직원들이, 리허설 공연이 종료된 후 관람객 출입구인 유리 피라미드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은 노동자와 문화 소비자의 경계가 전복되는 상황을 발생시킨다.
--- p.163, 「에이징 뮤지엄: 시간을 재영토화하기」중에서
(직접 가본 바는 없지만) 구겐하임에 비하면, 과천관의 램프는 경사가 가파르고 벽면에 전시물을 걸기도 쉽지 않은 구조다. 장애인의 ‘접근성’ 측면에서 효과적인 시설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그러한 목적으로 램프가 설계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나는 흥미로웠다. 램프 위에서 휠체어를 탄 몸이 이동할 때, 김태수나 백남준이 애초에 계획하지 않은 어떤 종류의 효과가 발생할 여지는 없을까? 1.3m 위치에서 바라볼 때 작품은 어떻게 달라 보일까? 그 다름은 ‘미학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일까?
--- p.174, 「램프코어에서 잘려 나간 것들」중에서
집은 편하게 작품을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작품이 독점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반면 전시장(미술관)은 오로지 작품 감상을 위해 용도가 지정된 유일한 건축 유형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작품 감상이다. 미술관에서 전시 공간 외 다른 모든 곳은 작품에 집중하는 사이사이 적절한 분절과 휴식의 리듬을 주기 위한 보조 시설이다. 만약 이 보조 시설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을 침범한다면 집보다도 어수선한 공간이 될 것이다. 좋은 미술관은 집에서 느끼는 작품과의 친밀함이나 사색의 여유가 가능한 전시 공간을 먼저 제공해야 한다.
--- p.194, 「미술을 위한 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