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비상에 대한 꿈보다는 너무 일찍,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사회의 한 기능을 담당하는 구성원이 되고자 애쓰면서, 영혼의 날개를 포기해 버리고 만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의 출발점은 ‘경외’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영혼은 우주를 보고, 세계를 보고, 자연을 보면서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감탄을 하고, 보다 깊고 본질적인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현대의 사상가들은 끊임없이 철학도 ‘과학적’이 될 것을 주문하고 또 젊은 철학도들에게마저도 어디에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인지를 반복적으로 묻고 있다. 게다가 오늘날의 기계기술문명은 수많은 매혹적인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영혼을 압도하고 있다. 현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젊은 영혼들이 ‘자유롭게 되고’, ‘해방될 필요’를 느끼게 하는 사회이다.
--- pp.6~7
소크라테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 명언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신탁을 받았다는 델포이 사원의 입구에 적혀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말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라고 하여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탁에서는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자를 소크라테스’라고 하였고,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자신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만이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p.63
‘이데아론’이 플라톤 사상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측면을 특징짓는 것이라면 그의 정치사상을 특징짓는 것은 철인정치이다. 철인정치란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혹은 왕이 철학을 공부하거나 하는 정치체제를 말한다. 그런데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철학자가 한 국가의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거나 말이 되지 않는 주장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최소한 진정한 철학자라면 ‘권력욕’이나 ‘명예욕’ 같은 것에서 초월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아니면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을까? 아마도 대통령을 의미하는 오늘날의 국가 수장이라면 굳이 철학자가 국가의 수장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필요하다면 국가의 수장은 철학자를 장관으로 두거나 자신의 조언자로 두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이 직접 국가의 모든 분야를 통치하던 시절, 그리고 직접 백성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였던 ‘소-도시국가’의 시절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러한 국가에서 국가의 평화나 국민들의 행복은 왕의 도덕적인 품성이나 지혜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p.107
그런데 어떤 분야에서 탁월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완벽한 기술을 소유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지나침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는 격언이 있듯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용기 있는 병사는 오히려 겁 많은 병사보다 먼저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너무나 신중한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 되고, 모든 일에 용감하고자 하는 자는 무모한 자가 될 것이며, 지나친 관대함은 허영심이 될 것이며, 향락을 무조건 회피하는 자는 목석같은 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자람도 지나침도 없는 어떤 상황에 적합한 가장 적절한 행위를 ‘중용(mesotes)’이라고 불렀다.
--- p.156
‘운명에 자신을 내어 준다’는 표현은 ‘개인적 차원의 운명’과 ‘우주적 차원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며 견디어 낸다는 것이다. 반면 ‘운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이러한 주어진 필연적인 상황을 극복하여 이 필연성에 굴복하지 않고 보다 나은 ‘자기 자신’을 창조해 낸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중요한 것은 주어진 운명을 다만 견디어 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견디어 내는가’에 있다. 이 ‘어떻게’는 곧 ‘운명을 도구 삼아’ 보다 나은 자신을 형성해 가는 방식이다.
--- p.189
스콜라철학이 시작된 이후부터 철학자들의 노력은 오히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기존의 교조주의적이고 교회중심주의적인 도그마로부터 이탈하도록 하는 토대가 되었다.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자 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스콜라(scola) 철학’, 즉 ‘대학의 철학’을 의미하는 이 시기의 철학은 교부철학에 높은 수준의 지성적인 논의들이 매우 활발했던 시기였다. 대학에서 다양한 교양이 강의되고, 논리적 추론에 의해 한층 발전된 변증법은 말 그대로 고유한 철학적 논의들을 매우 풍부하게 하였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수용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작업은 이성을 신앙에 종속시킨 기존의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신앙과 이성이 각자의 고유한 영역을 가지게 하였고 서로 상보적인 관계의 협력관계로 발전시켰다.
--- p.256
그래서 자유의지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사람, 즉 죄를 짓는 사람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 행위를 정죄하고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교정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죄의 행위 그 자체를 용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들은 용서하면서 잔인할 수가 있고, 벌주면서자비로울 수 있다”(『서간』, 153)라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행위에 대해 처벌한다는 것은 행위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복수법’의 의미도 있지만, 그의 잘못된 자유의지의 사용을 ‘교정하기 위한수단’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감옥에 관련된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을 ‘교정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 p.343
흔히 철학사 등에서 말하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라는 명제는 최소한 스콜라철학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있어서는 참된 명제가 아니며, 이는 선입견이나 오해에서 비롯하는 것이거나 매우 피상적인 방식으로 고려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신학과 철학은 엄연히 각자의 고유한 분야나 대상을 가지면서 또한 각자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p.416
인간은 누구나 ‘자율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양심을 가지고 있고 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자유롭게 창조되었다는 혹은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의 이유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자. 만일 도덕적인 행위가 모든 것이 이미 주어져 있는 계명이나 율법에 의해서 규정된 대로만 행위하는 것에서 성립한다면, 이 경우는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이고 인간이 스스로의 이해와 결단에 의해서 행위하게 되는 ‘자율적인 행위’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선행’이나 ‘죄’라는 말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행위가 죄가 있거나 혹은 칭찬할 만한 것은 (행위의) 주체에게 책임이 전가된다는 한에서”(신학대전』, 21, 2)이기 때문이다.
--- p.469
중세철학은 많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근·현대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는 비록 조선시대가 오래전에 끝났음에도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철학사적 차원에서 중세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조나 사상을 들라고 한다면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과 루이 라벨(Louis Lavelle)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에마뉘엘 무니에(Emmanuel Mounier), 자크 마리텡(Jacques Maritain) 등으로 대표되는 ‘인격주의(Le personnalisme)’ 일 것이다.
--- p.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