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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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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22쪽 | 204g | 130*210*10mm
ISBN13 9791191155365
ISBN10 1191155366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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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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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캄캄한 밤길을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어둠을 밝혔다

바람이 불었고
아지랑이가 피어
어른거렸고

길은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죽죽 뻗어 나갔고
그대 하나 남기고
그대 아니었다면 잃을 뻔한
곁가지로 뻗은 길을 가지치기하면서
안거安居 마친 운수납자雲水衲子처럼
도포자락 휘날리며
휘적휘적 걸었다

그 저녁
꽃이 피었고
별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어두운 밤하늘을
꽃잎이 스치었고
---「그 저녁」중에서

그 저녁
거기도 달이 떴나요
산 넘고 바다 건너 달빛에?
그대가 실어 보낸 꽃씨 몇 알이
이곳까지 날아와
아스팔트 빌딩 밑에
그대의 마음씨만큼이나 고운 빛깔로
꽃을 피웠습니다

우리의 가슴들
아스팔트처럼 팍팍하고
막장 같은 복마전을 치르느라
좌도 우도 시퍼렇게 멍이 들어도
이제는 저세상의 누이처럼
꽃을 피우고 꽃은 지고
다시 필 때마다 그리움은 맺히고
달이 차면 오겠다던
그날 저녁
그대에게 보낸 초승달이
만월이 되어 돌아왔습니까
---「거기도 달이 떴나요」중에서

뜨개질 손을 잠시 놓고 어머니 말씀하셨다
아범아, 슬픔과 행복은 원래 없는 것이란다
있지도 않는 것을
씨줄과 날줄 사이에 수놓으려 하지만
엮이지 않고
아지랑이처럼 사라질 것들만이 걸린단다
슬픔은 슬픔대로
행복은 행복대로 살아가게 놓아주어라
그것들은 너의 것이 아니니
알은척하지 말고 집안에 끌어들이지도
소유하려 하지도 말거라
때가 되면 제풀에 사라진단다
오늘은 어머니 잔소리가 듣기 좋다

아범이 세상에 나올 때
그리고 성장하면서 자주 쓰러질 때
사랑도 행복도 가르쳐 주었건만
어찌하여 너는 사랑보다 이별을 먼저 알았고
행복보다 슬픔을 먼저 알았더냐
아범아, 아픈 밤을 꼬박 뜨개질로 새우다 보면
씨줄 날줄에 한 코 한 코
에미의 꿈이 아로새겨지는 줄을 왜 몰랐더냐
---「어머니의 뜨개질」중에서

빛의 시절은 빨리 지나간다
발자국처럼 춤추며 빠르게 떠밀려
밀려오고 밀고 가는

저 살아남은 자들의
발자국 아래 밟혀서는
바르르 떨기도 하면서 떨어지는
이태원의 밤이
한 잎의 시절인 줄

몰랐지
그 시절 그 빛이
그 골목이
너와 내 시절 까무룩 지는
막다른 목숨일 줄은
막다른 시절일 줄은
---「시절 한 잎」중에서

사슴벌레는 집게가 사슴뿔처럼 생겼다

슴은 뿔을 휘젓고 뛰어다니지만
천적에 맞서 자기를 방어하는 도구이다
나에겐 뿔이 없다
아무런 뿔을 갖지 않고서도
복마전에 버티며 살아간다
뿔을 갖고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내는 것이라면
내 뿔은 머리가 아니라 몸뚱이 안으로 자란다
천적이 나타날 때마다
몸뚱이 안으로 깊이깊이
사슴뿔보다도 더 무시하게 뿌리를 내렸다
---「뿔」중에서

살아 보니 닳고 닳아
기억 속에 캄캄하게 묻혔다
믿었던 것들이
닳고 닳은 듯해도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걸 보니
모두 계획이 있었나 보다

살아 보니
잊고 지나간 것들이
잊히고 지나간 듯해도
험한 세상 되는대로 살아도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와
알을 낳고 새끼를 치는구나
---「살아 보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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