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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불개미

개미와 불개미

정혜경 | 전망 | 2023년 08월 1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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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214쪽 | 135*200*130mm
ISBN13 978897973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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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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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만나다니.”
그는 해맑은 웃음을 안면 가득 지어 보이며 ‘우리’라 말했다. 그의 시야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오랜 시간 그리던 연인을 만나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내 손을 사정없이 잡아 흔들기까지 했다.

18년이라는 시간은 그의 얼굴에 흔적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덕분에 그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늘어진 미소와 함께 나의 어깨며 뺨을 함부로 만지는 그의 손놀림 또한 여전했다. 그의 시간은 성장이 필요 없는 세상만을 흘러온 것이 분명했다. 그의 직함과 그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이 견고했다. 누군가의 삶을 위선으로 패대기치기에는 그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그는 화사하게 웃으며 나의 기안을 파쇄기 속으로 집어넣었다.
“김소연 씨, 다시 해야겠어. 이거 내가 예전에 다 한 거야.”
지난 6개월 동안 짜낸 나의 고혈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과식을 한 인간의 몸이 그렇듯 파쇄기에도 이상 열기가 차오르고 있다. 물론 세상 그 어디에서도 파쇄기의 분노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감당해야 할 시간만이 주검처럼 서늘한 한기로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나를 참혹하게 가라앉혔다. 내 삶을 송두리째 파 먹힌 나는 새벽 그믐달처럼 곧 사라질 위기에 놓인 셈이다. 파쇄기는 나의 기안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도 얌전하게 시치미 떼고 있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친절하다. 그가 어떤 말을 내뱉든 지체 없이 호들갑스러운 반응으로 화답하기 때문이다. 나의 비명과 신음에만 무심하다. 내 편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들은 항상 미소 띤 얼굴로 다정하게 위로한다.
“MS의 정규직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잖아? 그게 어딘데? 김 대리 기안이 오너의 아드님 게 되는 거? 그거, 영광으로 생각해야 돼. 아랫것들 고혈 짜서 윗사람 승진하는 거야 절대 변하지 않을 조직의 오랜 전통이야. 그러니까 웃어. 웃어야 복이 들어온다니까.”
특히 나처럼 여자로서는 망한 나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입사한 경우에는 더 그렇다. 경력직으로 들어왔지만 나의 나이만이 늘 문제가 된다. 다들 최연소에만 열광했다. 여자의 나이는 쓸모없는 일감으로 전락하는 데에 기여할 뿐이다. 독보적인 성취를 이룬 극소수만이 꿈을 꿀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희망이 없다.

내게도 세상 물정이라고는 모를 때가 있긴 했다. 그때는 나도 남들처럼 희망을 가졌다. 심지어 모든 것을 가졌다고까지 생각했다. 다른 집처럼 아귀가 잘 맞는 가족 구성원이 있고, 비 가려줄 집이 있었기에 나도 남들처럼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철없는 생각이었다. 나처럼 빚 외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 그래서 나는 늘 나를 위로하며 버텼다. 하지만 이제 아무 소용이 없다. 내 처지가 세상 그 누구보다 나쁘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그를 마주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매일 똑같은 문제로 시험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버릴 것이 없어 보이는데도 온전히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정말이지 모순되게 어렵다.

나는 경력직으로 당당하게 입사했다. 하지만 다들 나의 경력이 입증되는 프로젝트보다는 생물학적 나이에만 관심을 가진다. 나이가 너무 많으니 결혼하기는 힘들겠다는 것이다. 걱정의 말처럼 들리는 그들의 말은 걱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편치 않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서른여덟인 내 나이가 많아서 결혼을 꿈꾸기 어렵고,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젊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에 끼어버린 셈이다.

너랑 동갑내기 남자가 있긴 한데 걔들한테 미안해서 소개는 못 시켜주겠어. 다들 네 나이보다는 적은 애를 원하거든. 나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은 위로하는 이의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를 죽이는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남다른 경력으로 얻어낸 나의 직함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자리일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곧 질식해서 죽을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지만, 사원증을 버리는 일은 더 어렵다.

미디어 서비스 개발 부서 사람들은 나에 대한 그의 어떤 행동도 당연하다는 듯 편안한 시선으로만 본다. 그러나 내게는 지옥이 매일 똑같은 광경으로 재현되고 있을 뿐이다. 기억이 소멸되지 않았다면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 그의 미소였다. 그가 한 번 웃을 때마다 당장 나가라는 호통과도 같은 이명이 들려온다. 그는 나의 땀과 혼과 시간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저 파쇄기처럼 나의 삶을 송두리째 깨부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소유한 자들의 자식들이 그렇듯 파쇄기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본부장이 되고 오너의 자리로 들어앉을 것이다.그는 회사 맞은 편 건물 앞에서 펄럭이는 까마득한 쇠기둥 끝 깃발처럼 늘 당당하다. 그래서 내 삶은 암울해졌다. 그가 주도하는 회의는 절망과 회의만을 가져왔고, 약자와 배려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감당하기 어려운 역겨움만 치솟았다.

그를 가까이에서 만난 건 대학에 첫 발을 내디딘 신입생이었을 때였다. 소개팅이 빈번했을 무렵 만나게 해달라고 석 달 째 괴롭히는 선배가 있다며 징징대는 친구가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정신이 없다고 하자, 친구는 나를 속여서 그가 앉아 있는 곳으로 끌어다 앉혔다. 통성명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중학교 선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슬금슬금 내 어깨를 만지기도 하고 급기야는 내 뺨을 툭 건드리기조차 하며 시종 웃고 있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오빠는 엄마의 남다른 노력에 힘입어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가능해졌다. 정신지체 3급의 경우 자폐증만 심하지 않으면 학교생활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 학업 성적으로 고민만 하지 않으면 된다. 엄마와 나는 그 문제에서 일찌감치 놓여났다. 세상 모든 이치를 아는 듯이 보이는 오빠는 연산에 있어서만 오작동이 심했다. 아니, 작동 자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수학 점수는 10점 이하로만 받았다.
“오빠, 이 빵 하나에 또 하나 더하면 둘이지? 둘! 그래, 여기에 하나를 더하면? 둘!”
오빠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외칠 숫자가 ‘둘’이라는 것을 정하고 있는 사람처럼 오직 둘만을 외쳐댔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게 10년 동안.
아니다! 두 개다. 아니야, 하나에서 또 하나 더했을 때 두 개였잖아. 이거는 두 개가 아니고 세 개인 거야. 하나, 두울, 셋, 셋 해봐. 아니, 셋 아니다 두 개다. 그리고 오빠는 울부짖었다. 어떤 날에는 둘이라고 말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생각을 거부하는 세상을 향해 절규하는 듯이 보였다.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글을 줄줄 읽으면서도, 연산에 있어서만은 언제나 어디서나 ‘둘’이라고만 외쳤다. 그러나 엄마는 화사하게 웃으며 오빠와 산수 공부를 매일 했다. 마치 엄마가 말을 배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오빠는 결국 해냈다. 아니, 장한 어머니상 감인 엄마가 해낸 것이다. 영원히 셋이라 말하지 않을 것 같았던 오빠는 십 년의 세월이 더 지나자 셋을 말했고, 연이어 넷을 말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엄마와 오빠는 백만 번도 넘게 말하고 또 말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엄마와 오빠는 서로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보내듯, 게임을 하듯,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둘에다 하나를 더하면’을 말했다. 내가 오빠와의 산수 공부를 작파한 이후부터 십 년이나 더 놀고 또 놀았다. 오빠가 셋을 공부하던 그 시절은 내 마음속에 화인처럼 박혀 있다. 오빠가 산수를 모르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다.

고요했던 일상을 난자하듯 찢어 놓은 사람은 학생회장 엄마였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3학년 학생회장의 엄마는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며 반장들을 모았고 오빠를 때려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저 물건은 우리 학교의 수치야! 학교 점수 다 잡아먹는다고, 시험 치는 날은 오지 말라고 그만큼 귀띔을 해줬건만.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알아듣게 만들어줄 수밖에!”
단지 걸음이 부실해 자주 넘어졌다는 이유로, 수학 점수가 나쁘다는 이유로, 오빠는 여섯 개의 이를 잃었고, 코뼈가 부러지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경찰서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고 가해한 아이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자의 호통에 주눅 들어 있던 경찰들은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엄마에게만 언성을 높였다.
“저런 애를 데리고 어떻게 일반 중학교엘 보낼 생각을 하냐! 분수를 알아야지 분수를!”
“저분이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저랬겠냐고! 당신 생각만 하지 말고 다른 사람 생각도 좀 하고 살아야지. 이기적인 사람들이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니까. 제발 좀 조용히 삽시다.”

오빠를 두들겨 팬 그들은 모두 반장이었기에 모범 청소년상을 받았고 만행의 주범인 회장 엄마는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교장실 청소를 하던 나는 나의 존재를 모른 채 통화하는 교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상 수집가로 나설 셈인지, 그 상도 적다고 밤 열두 시에 전화를 해서는 상이 왜 이것뿐이냐고 항의를 하더라니까.”
그의 아들은 고등학교에 가서도 학생회장을 했고 갖가지 상을 모아서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이제 유학파에 오너의 자식이기까지 해서 아우라가 남다른 특별 인종이 되어 나의 상사로 산다. 초중고를 지나는 동안 전교 회장만 해온 그가 특별 학생이었듯.

사원증에 박힌 내 직함은 20대와 30대를 고스란히 태워 넣고도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직함은 나의 노력에 비하면 거저 얻은 하찮은 것이라 아무런 의미가 없다. 평가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달랐다. 나를 보면 결혼도 못 할 여자가 일이나 해야지 그 나이에 겨우 대리냐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버지가 회장이라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착해서 우리의 팀장이 된 것이라며 칭찬만 자자했다. 게다가 나를 두고는 예의를 넘어선 특별한 아부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불손하기까지 하다며 다들 경악한 뒤 경멸했다.
---「개미와 불개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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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소설가는 자전소설인 『사라진 이름』(산호수, 2012)에서 작가란 “반드시 진술되어야 할 것을 진술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정의는 이번 소설집 『개미와 불개미』에서도 유효하게 쓰인다. 그녀는 여전히 작가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자신이 써야 할 소설들을 써나가고 있다. 개인적인 삶에서 오래도록 견지해온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작품 활동을 하는 일, 특히, 고통으로 점철된 삶의 이야기를 소설로 재구성하면서 그것과 마주하는 건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길을 걷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 치열하게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정혜경 소설가가 지닌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 양순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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