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우리 사회를 장악한 뿌리 깊은 가부장적 사고와 그것이 우리 환경과 삶의 일상적 디자인에 미치는 영향을 파헤친 나의 탐험 여행을 기록한 책이다. 또한 이 책은 기존 구조와 사고와 디자인을 흔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와 그들이 가부장적 패권주의의 반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기록한 책이기도 하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이 책은 세상이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인지, 그 모습이 왜 많은 사람들에게 적절치 않은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논의한다. 이 책은 꽃무늬 원피스에 관한 이야기이자 축구화 이야기이고, 비디오 게임과 섹스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여자를 억누르는 게 유일한 목적인 아이디어와 고안물들, 즉 전혀 의미 없는 성 인지적 디자인을 다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업적을 쌓는 것이든 아니면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든 여성의 능력 발휘를 막는, 성 인지적이지 않은 디자인을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 거의 모든 사물의 기본 설계가 어떻게 가부장적 디자인으로 되어 있는지를 파헤칠 것이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푸슈는 독일어에 나타나는 이러한 성별 부조리를 ‘총칭적 남성형’이라고 부른 최초의 여성인데 이 문제를 다음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99명의 여자 가수(Sangerinnen)와 1명의 남자 가수(Sanger)를 합하면 100명의 남자 가수(Sanger)가 생긴다. [그러나 99개의 배(Birne)와 1개의 사과(Apfel)를 합하면 100개의 사과가 아니라 기껏해야 100개의 과일(Fruchte)이 생긴다!] 99명의 여자는 없어졌다. 찾을 수가 없다. 남자들의 서랍 속으로 사라졌다.”
--- 「제1장 언어」 중에서
여성 과학자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든다. 다윈의 진화론, 뉴턴의 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멘델의 법칙,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해당 이론을 발견한 과학자의 이름, 정확히 말하면 성을 달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퀴리의 방사성 원소, 마이트너의 핵분열, 괴페르트 마이어의 원자핵, 프랭클린의 DNA 이중 나선 구조 같은 명칭은 없다. 마지막 두 여성의 이름은 나도 최근까지 몰랐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뒤에야 그들이 획기적인 사실을 발견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처음 발견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1952년에 유전자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DNA의 존재는 발견했으나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모든 생명체의 구성 요소와 구성 원리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전문가들 외에는 그 이름은 고사하고 존재 자체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 「1장 언어」 중에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피닝은 가장 먼저 범칙금 통지서를 받은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노트북을 켜고 야간에 이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범칙금 140유로와 수수료 9유로를 내는 대신 이의를 제기하기로 했다. 2015년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에는 35개의 플라스크룰 남성용 소변기와 두 군데의 양변기 화장실이 있었다. 그중 피닝이 밤중에 서 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양변기 화장실은 1.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
네덜란드 전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같은 해에 네덜란드에는 야간에도 이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이 565개 있었는데 그중 204개가 남성용 소변기였다.
--- p.56, 「2장 공공장소는 누구의 것인가」 중에서
에른베르예르는 위험을 상징해야 하는 남성적 코드의 기계들이 어둡고 칙칙한 검정과 초록색으로 디자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흔히 버튼과 고정 나사에도 시그널 컬러가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성적 코드의 기기는 대개 밝고 매끈하며, 각진 모서리도 적고 옵션도 많지 않아 말하자면 사전 지식 없이도 사용할 수 있다. 남성적인 기계는 ‘전동 공구’이고 여성적인 기계는 ‘보조 기기’다. 이런 구분은 독일어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독일에서는 ‘전동 공구’(Elektrowerkzeug)와 ‘주방 보조 기구’(Haushaltshilfen)라는 말을 사용한다. 전자가 남성과, 후자가 여성과 연결된다는 것은 누구나 단박에 알 수 있다. 이것이 디자인 다음으로 마케팅에서 중요한 차원이기 때문이다. 남성적 코드의 기계를 ‘조작’하는 것은 권력 행사와 다름없지만, 여성적 코드의 가전 기기 ‘사용’에는 단순히 보조적인 기능만 내재해 있다. 남자는 구멍을 뚫고 톱질과 망치질을 함으로써 뭔가를 ‘창조’하는 반면, 여자는 기술의 지원을 받아 가사를 ‘처리’한다. 음식 준비가 벽에 나사를 고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창의성과 손재주를 필요로 한다고 쉽게 주장할 수 있지만, 나사 고정은 남자가 손 기술을 발휘하는 활동으로 이해되고 있는 반면, 점심이나 저녁 식사는 누가 화덕 앞에서 국자를 들고 요리하든지 상관없는 일상적인 일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 「3장 “분홍색을 입혀라, 크기를 줄여라”」 중에서
1998년부터 ISS에 탑승한 240명의 우주 비행사 중에서 여성은 고작 34명이다. 우주 비행을 하는 여성의 수는 최근 몇 년간 증가했다. 메이어와 여자 동료 크리스티나 코크는 2019년 10월 여성 우주인만의 첫 ‘우주 산책’에 나섰다. 그럼에도 ISS의 기반 시설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여성 우주인들은 전과 다름없이 그들을 위해 조성되지 않은 여건에서 일해야 한다. 그곳은 그들보다 키가 크고 체중이 무거운 남자 동료들을 위한 곳이다.
이들은 공적을 쌓은 명망 있는 여성 우주인으로서 언젠가는 다시 지구로 귀환한다. 토크쇼에 초대받아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사만타 크리스토포레티의 경우처럼 뒷맛이 씁쓸한 영웅 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다. 2020년 5월 크리스토포레티는 토크쇼 《쾰너 트레프》에서 너무 큰 우주 장갑에 대해 이야기한 뒤 우주 체류를 위해 딸을 혼자 남겨두어야 했던 일에 대해 해명해야 했다.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앙드레 류로부터 그곳을 떠나온 지금 누가 우주 정거장을 청소하느냐는 농담을 듣고 참아야 했다.
--- 「5장 해봐」 중에서
미국 냉난방공조협회(ASHRAE)는 1966년 이른바 ‘애슈레이 표준 55’라는 규정집을 발표했다. 여기서는 두 가지 기준이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첫째는 이른바 신진대사 해당치(MET, Metabolic Equivalent Task)이다. 사람이 다양한 활동을 할 때의 에너지 소비량을 말한다. (사무실에서는 주로 앉아서 생활할 것이다) 둘째는 늘 사무실에서 입고 있는 옷이 제공하는 단열 효과다. 규제 표준은 복잡한 공식으로 표현되었지만 핵심은 몸무게가 70킬로그램인 40대 남성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사실상 미국의 TV 드라마 시리즈 《매드 맨》(Mad Men)에 나온 1960년대 모델 돈 드레이퍼가 표준화된 사무실 온도의 원형이다. 시리즈에서와 같이 불만을 표시하는 여성은 모두 비서 자리로 돌아가 말없이 한기에 몸을 떤다. 돈 드레이퍼에게는 아무 문제가 아닌 것이 그의 여비서 페기 올슨에게는 불만거리이다.
2015년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흐트 대학에서 16명의 젊은 여성을 차례로 냉방이 된 방으로 들여보내는 실험을 했다. 모두 똑같은 복장(속옷, 티셔츠, 조깅 바지, 양말)을 하고 책상 앞에 있는 표준 규격의 사무실 의자에 앉게 했다. 그런 다음 실내 온도를 바꾸고 여성들에게 각각의 온도를 얼마나 쾌적하게 또는 불쾌하게 느꼈는지를 말하게 했다. 그 결과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약간 따뜻한 것(실험 방식과 지역에 따라 섭씨 3.1~5도의 차이가 있다)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 외에도, MET에 적힌 표준 수치보다 몸에서 열을 적게 생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MET 일람표 역시 놀랍게도 남자들의 수치를 참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추위를 느끼는 것 이상의 것을 말하려 한다. 추위를 느끼면 창의적 작업, 학습, 말하기, 생각하기 같은 모든 지적 활동이 멈춘다. 몸이 자원을 아껴, 뇌를 제외한 모든 필수 기관이 있는 몸통으로 보내기 때문이다(심지어 뇌 기능이 멈춘다). 따라서 여성의 몸만이 아니라 여성의 생산성도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이건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누구나 살면서 MET가 감소한다. 이 말은 나이가 들수록 추위를 탄다는 뜻이다.
-- 「5장 해봐」 중에서
전에 나는 여자 프로 선수들과 경기한 적이 없다. 지금 우리는 모두가 함께 모였다. 전 세계 곳곳에서 프로와 아마추어 선수들이 왔다. 나는 어린이 축구화를 신어야 하는 게 화가 났다. 그건 플라스틱과 정말 형편없는 재질로 만든 신발이었다. 나는 남자 축구화를 신어야 하는 게 싫다. 어린이 축구화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싫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잠깐만, 뭐라고? 너는 너한테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뛴 거야?!
일반인인 내가 보아도 통계 속의 숫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여자는 축구를 남자들과 다르게 한다. 남자보다 덜 뛰고, 남자보다 롱 패스를 더 많이 하고, 남자들과 다르게 공을 찬다.
로라 영슨처럼 카타리나 알트호프도 축구를 오래 했다. 자신의 신발에 대한 불만이 2016년 여성을 위한 축구화 개발의 필요성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쓴 이유의 하나였다. 알트호프는 현재 에센 대학교 스포츠 및 운동학 연구소에 재직하고 있다. 신발의 예를 보면 여자 운동선수들이 키 작은 남자 선수들이 아니듯이 여자 축구 선수도 키 작은 남자 축구 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알트호프에게 왜 꼭 여자들이 자신에게 맞는 축구화가 필요한지, 축구화의 개발은 왜 여전히 걸음마 단계에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 「6장 옷이 날개다」 중에서
2018년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사건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강간 혐의로 기소된 27세 남성의 최후 변론에서 변호인은 피해자의 (레이스로 된) T-팬티는 섹스에 동의한다는 뜻이므로 T-팬티를 착용한 17세 여성은 강간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아침에 그 팬티를 입을 때 이미 향후 있을 모든 성행위에 동의한 것이기 때문이며 어쩌고저쩌고 허튼 소리가 이어졌다. 배심원석에는 8명의 남자와 4명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소녀를 골목길에서 강간한 남자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6장 옷이 날개다
그러나 세속화된 세상이라도 성적인 순수함과 처녀성, 즉 여성의 ‘무결성’은 문화재로서 여전히 높은 위상을 누린다. 이는 가부장적인 기획으로만 설명되는 현상이다. 이 문화적이고 관념적인 가치를 금전적 가치로 멋지게 바꿔놓는 예가 이른바 약혼 해제 위자료(Kranzgeld)다. 독일 제국시대에 도입되어 1998년까지 독일 민법의 일부였던 약혼 해제 위자료는 제1,300조에 명시되어 있다. 처녀의 ‘정조 훼손’은 정신적 손해이며 따라서 손해 배상의 대상이라는 게 그 요지다. 반면에 구 동독에서는 1950년대 초부터 이 위자료를 위법한 것으로 선언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남녀가 약혼 중에, 즉 혼인을 약속한 기간 중에 성관계를 했다가 약혼이 해제되는 경우다. 남자는 곧 결혼한다는 구실로 자신의 페니스를 여자의 질에 삽입한 것에 대해 손해 배상을 해야 한다. 그로 인해 여자의 사회적 가치가 돌이킬 수 없게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약혼 해제 위자료는 ‘순수하고 무결한’ 여성의 이미지에 직접 금전적 가치를 매기는 것이다. 20세기 초에는 배상액이 수천 마르크였으나 수십 년이 지나면서 처녀성의 가치는 몇백 마르크로 떨어졌다.
--- 「7장 우리는 무엇을 장려하는가」 중에서
두 여성 동성애자는 영화가 다음의 기준을 충족해야만 영화관에 가겠다고 말한다. 첫째, 적어도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해야 한다. 둘째, 이들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셋째, 이들은 남자 이야기 외에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유머러스한 관찰로 시작했다가 금세 간단하고 보편적인 분석 도구로 응용된 이것이 바로 벡델-월리스-테스트다.(중략) 시사 라디오 채널인 도이칠란트풍크 쿨투어(Deutschlandfunk Kultur)에서 2014년 베를린 영화제 후보작에 오른 20편의 영화를 벡델-월리스-테스트로 검토했을 땐 겨우 세 편만 통과했다.
--- 「7장 우리는 무엇을 장려하는가」 중에서
아, 천재…. 여기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해야겠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 천재는, 가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배우 바바라 에덴을 제외하면, 남자이기 때문이다. 신동은 다 알다시피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이가 여자가 되면 그땐 망한 거다! 오직 남자만 손재주 단계를 초월해 예술의 경지로 들어선다. 오늘날까지 남자가 예술적 가치의 기준인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소개한 〈풍선과 소녀〉의 파쇄 보도에서 뱅크시란 천재에 대해 언제나 ‘그 남자’(er)라 지칭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예술에서 프로젝션 스크린을 가지고 하는 놀이는 사실 매우 단순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뱅크시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고 몇 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뱅크시라는 사람이 남성 미술가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예술가를 판단하는우리의 기본 태도이기 때문이다.
--- 「7장 우리는 무엇을 장려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