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색 벽돌. 표범무늬 표범. 소라모양 소라. 세상에는 설명이 되지 않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냥 아는 것들. 들으면, 알게 되는 것들. “H2라는 만화 알아? 거기에서 보면 남자 주인공이 그래. ‘내 사춘기가 남들보다 늦었을 뿐이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지유의 말에 창엽이 코딱지를 파서 튕겼다.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나는 코딱지를 애써 외면하며 지유는 설명을 계속했다. “남자 주인공한테 소꿉친구가 있거든. 그런데 남자 주인공은 자기가 걔를 좋아하는 걸 몰랐던 거야. 어렸을 때부터 항상 함께 있었으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뺏겨.” “그 남자 게이였어?”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친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며?” “여자 소꿉친구!” 씩씩거리며 지유가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창엽은 아아 하고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뿐이었다. 이미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지개 너머로 사라졌다. 중요한 건 ‘소꿉’이라는 단어건만 최창엽은 잘도 핵심을 피해갔다. 서울대학교 건설환경공학부 수석을 아무나 하는 건 아닐 테니 머리가 나쁜 건 분명히 아닌데 이러는 거 보면 완곡한 거절의 뜻이려나? “그래서?” 지유가 인상을 구기고 있는데 창엽이 발로 지유의 장딴지를 툭 찬다. 벤치에 누워 있으면서 다리 긴 거 자랑하는 건지 잘도 건너편 벤치에 앉아 있는 지유를 건드린다. 아직 추워서 꽃이 피지 않은 등나무는 가지만 앙상한데 최창엽과 한 화면에 보다 보니 꽃이 핀 것 같다. 최창엽이 꽃돌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뭐냐고?” 지유가 가만히 있자 창엽이 보챈다. “뭐가 그래서야?” “H2라는 만화에서 게이가 아닌 남자 주인공이 소꿉친구를 다른 사람에게 뺏겼는데…… 어떻게 되었냐고?” 이렇게 묻는 걸 보면 또 그냥 눈치 없는 것뿐인 듯도 하고. “결국 여자애는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해져. 나중에 주인공은 후회하고 안타까워하지만, 사실 그 여자애도 주인공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서로 알게 되지만 한번 지나간 인연은 다시 돌아오지 않거든.” “그래서 주인공 남자애는 혼자 살아?” 엥? “아, 아니…….” “그럼? 게이가 돼?” “아, 아, 아니…….” “그럼?” “……괜찮은 여자애를 만나.” “오오오, 잘됐네. 괜찮은 만화책이다, 그거. ……아름답네.” 이게 아닌데……. 창엽은 해피엔딩에 만족한 듯 벌떡 일어났다. 패딩 점퍼에 손을 찔러 넣고 가볍게 몰아쉰 숨결이 하얗게 허공에 부서졌다. “하고 싶다는 말은 그거야? 만화책 추천?” 그거겠냐! “……응.” “그 이야기를 뭘 밖에 나와서 해? 추워 뒤지겠네. 들어가자. 나 추워.” “먼저 들어가.” “너 홍삼 먹냐? 좋은 거 먹어? 난 먹어도 춥던데.” “닥치고 먼저 들어가! 이 똥개 같은 자식아!” “언어 사용 봐라. 너 그날이야?” “야! 뒤질래?” 소리를 버럭 지른 지유가 인정사정없는 발차기를 날리자 잽싸게 몸을 피한 창엽이 껄껄 웃고는 돌아섰다. “추워. 애써 축적한 지방 탄다. 얼른 들어와.” 마지막까지 염장을 지르고 돌아서는 그의 이름은 최창엽. 성지유의 소꿉친구다. 그리고 아무리 말해도 소꿉친구였던 여자아이가 이제는 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빙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