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치료받기 위해서 치료하는 이에게 협력해야 하듯이, 밝은 빛은 밝혀지는 어둠과 함께 작용합니다. 하지 만 밝혀진 어둠이 예수님에 의해서 빛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우리를 크게 위로합니다. 바리사이 집에 왔던 죄 많은 여자의 역설적인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그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사랑을 증명하면서 모든 이 앞에서 자신의 죄를 드러냅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큰 사랑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틀리지는 않았지만 인색한 태도를 지닌 것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의 빛이 그에게서 한계에 부딪히고, 그의 마음과 예수님 마음 사이에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p.34-35, 「제1부 제1장 예수님은 사람을 얼마나 아시는가」 중에서
하지만 갑자기 아드님은 아버지께 몸을 돌려 사람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분이 됩니다.
우리는 ‘대사제의 기도’에서 예수님을 특히 그런 분으로 만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곁에 있는 이들과 그들을 통해서 믿음을 얻을 모든 이를 위하여 성부께서 내밀한 삼위일체적 결합 안에 그들을 감싸 달라고 기도하십니다(요한 17장 참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참되고 최종적인 대사제로서 당신의 직무를 수행하셨기에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히브 7,25)
--- p.71-72, 「제2부 제2장 예수님의 앎과 우리」 중에서
그렇다면 여기서 무비판적인 근본주의와 성경 문자주의로 급격하게 귀환이 이루어져야 할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진지한 연구는 그것이 신앙의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오히려 그 요소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서 형성된 전승의 흐름이 어떻게 모이고 채워지고 다양한 특징적 형태를 얻는지 보여 주고자 몰두할 때,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신앙 고백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물론 여기서 의심의 여지없이 조명하는 부활의 빛이 성령의 해석 아래 대표적이며 기준이 되는 그리스도 사건의 전체 모습이 형성될 때까지 이전의 관계를 되비춥니다.
--- p.100-101, 「제2부 제1장 사람을 안다는 것과 사실을 안다는 것」 중에서
이러한 과정은 수난에서 완성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느님께 어떤 모욕을 가하는지, 하느님께서 어느 정도까지 당신에게 충실히 머무시는지[“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요한 3,16)],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의 내적 사랑 안에 어떻게 머무시는지(이 사랑은 성부에게서 버림받는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궁극적으로 가시화됩니다) 드러내시는 분이 됩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역사적 인간이 누구인지 보여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유다인, 이방인 모두 살아 계신 계약인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하며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성금요일은 신적이고 인간적인 최종적 진리의 시간입니다. 모든 것을 가리는 어둠 속에서 사실이 가장 밝게 드러납니다.
--- p.121, 「제2부 제2장 하느님의 해석자인 예수님‘ 중에서
아는 것과 믿는 것, 이 두 가지는 명백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것을 요구하는 한 인물의 확실함에 동의하는 긍정의 유일한 행위를 구성합니다. 아는 것이 믿는 것을 뒷전으로 밀지 않으며, 믿는 것이 알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긍정하는 영역으로 밀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과 신앙인 사이에 친밀한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 이 상호적인 앎은 상호적인 개방으로서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고, 안을 들여다보도록 허용합니다. 이것은 어떤 임의의 삶이 아니라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 p.146-147, 「제2부 제3장 예수님의 해석자인 성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