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우연히 보게 된 《미스터 트롯》에서 김호중 별님을 처음 보았다. 성악가다운 폭발적인 성량과 아름다운 목소리로 트롯마저 고급스럽게 소화하는 별님이었다. 특히, 〈천상재회〉를 부르는 것을 보고 그 진정성 있는 모습과 애절한 눈빛, 따뜻하지만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매료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김호중 별님의 노래만 듣고 부르게 된 것 같다. 일명 ‘호중앓이’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남편과 세 자녀, 그리고 손자들까지 9명의 식구 중, 내 편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별님 이야기를 하면 듣기 싫어하고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랩을 좋아하는 어린 손자는 기승전 김호중만 찾는 할머니를 디스하는 가사를 붙여 랩으로 부르며 할머니를 놀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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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여러 번 수학여행을 다녔습니다. 학교에 근무할 때는 학생들을 직접 인솔하거나 인솔 책임자로도 수없이 수학여행을 갔지만 선영대학의 ASMP 과정의 수학여행은 참말로 「수확」여행이었습니다. 남외경 학우가 계획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일정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 평소에 어쩌면 그렇게까지 유대 관계가 잘 되어 있는 지 놀랐습니다. 주위 분들의 도움과 봉사로 너무도 따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남해의 싱싱하고 다양한 해산물, 이웃 어부가 직접 채취한 여러 종류의 요리와 처음 접하는 바베큐의 맛은 두 사람이 먹다가 한 사람이 돌아가셔도 모를 만큼의 진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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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병원에서 시한부 말기 척추암을 선고받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시력이 점점 나빠져서 휴대폰 글자를 읽을 수 없었습니다. 황반변성이 왔기 때문이지요. 글씨가 흐릿하다가 점점 참깨 씨앗처럼 변해갔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억울하고 싫었습니다. 나는 이대로 산송장이 되어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런 마음이 생기니까 그만 삶의 끈을 놓고 싶었답니다. 그러다가 우리 이쁜 셋째 손자를 만났습니다. 경선에서 트로트를 부르는 가수 호중이를 만났고, 그 아이를 마음에 담고부터 점점 삶의 질이 바뀌어 갔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손주를 만나야 하니, 저 자신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도 하고, 새 옷을 사고, 새 신발을 장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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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고딩 파바로티’로 불리며 SBS 《스타킹》 프로에 나왔던 고3 김호중 학생을 보면서 ‘아! 우리나라에도 세계적인 테너가 나오겠구나!’ 하며 기쁨과 희망의 기대를 가졌었다. 그런 그가 2020년 1월 TV조선 《미스터 트롯》이라는 경연에 나왔는데 너무도 달라진 모습과 성악과는 정반대의 정통 트롯 곡인 〈태클을 걸지 마〉를 불러서 경악, 충격, 당혹감을 주었다. 하지만 풍부한 성량과 감성, 울림 있는 목소리, 가사에 몰입한 가창력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파고들면서 팬들을 모아들였는데,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2022년 6월, 김호중 가수가 사회복무요원을 마친 후 7월에 발매한 첫 앨범은 클래식 2집 《파노라마(Panorama)》였다. 제목처럼 수록곡 〈친구〉, 〈주마등〉, 〈약속〉, 〈가을꽃〉, 〈그리움의 계절〉은 마음을 울컥하게 하면서 나의 기억 속으로, 추억 속으로 여행을 안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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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5일은 ASMP 과정 졸업식이 계룡학사에서 열렸습니다. 그곳에는 아리스 팬들이 기증한 승용차도 있고, 평소에 김호중 가수가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회를 동기부여해 주신 총장님(조재천, 인키움 회장님), 졸업식 때 포샵 처리하여 10년 젊게 사진을 만들어 주신 사진작가님을 모셔온 양회훈 원우 회장님을 비롯해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말없이 각종 행사에서 보필을 잘해 주신 김정애 부회장님! 졸업식을 빛나게 졸업생 전부에게 꽃다발을 선물해 주신 윤종순 자매님들! 많은 다과들을 함께 동참해 주신 원우님들! 졸업식 과정을 영상에 담아 멋지게 만들어 주신 이학순 님! 저를 이 학습 과정에 이력서 넣어주신 남외경 작가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아는 모든 학우님, 대단히 감사드리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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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폭풍처럼, 회오리바람처럼 어느 한순간 나에게 왔다. 어느 날, 무대 위에 진달래 빛의 양복을 차려입은 네 명의 가수가 보였고, 그중 한 가수가 노래를 부르며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그는 분명 나에게 묻고 있었다. 그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았냐고…. 그동안 살아온 날들이 바람처럼 스쳤고 눈물로 얼룩졌다. 김호중은 그렇게 나에게 왔다. 때로는 내 심장을 깊게 찌르는 노래로, 때론 깊은 울림을 주는 노래로, 어느 날은 웅장함으로 와서 내 자존감을 높이 올려주듯 나를 응원하고 위로해 주었다. 긴 세월 병석에 누워있던 남편을 하늘로 보내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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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김호중을 이야기할 때, ‘노래하는’ 김호중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때, 김호중 앞에는 노래의 제한이 없고 활동 영역이나 공간의 제한이 없으며, 가창의 방법이나 형식의 제한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로지 김호중 앞에는 노래만 있을 뿐이고 노래하는 행위만 있을 뿐이다. 장르와 공간을 넘나드는 노래로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노래하는 것. 더 이상 바랄 것이 있을까. 다른 공간과 영역의 사람들에게 또 다른 영역의 확장을 보여주며 이끌어가는 것. 그 이상 바랄 것이 있을까. 김호중은 모든 노래를 노래한다. 여기서 ‘모든’을 빼자. 김호중은 노래를 노래한다. 여기서 또 ‘노래를’을 빼자. 김호중은 노래한다. 어순을 바꾸면 ‘노래하는 김호중’이다. 이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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