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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구릉 어디쯤 낙타는 나를 기다리고

걷는사람 시인선-090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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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9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160쪽 | 170g | 125*200*20mm
ISBN13 9791192333922
ISBN10 119233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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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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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먹음직하게 잘 익은 사과를
광주리 가득 따서 담았다

나무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중략)

보여 줄 것도 없는 내게
광주리를 들고 걸어 들어오는
알 듯도 한 그 사람

사과를 입안 가득 베어 먹는 시간이
달콤하고 황홀한 밤이었다면
훌륭한 밀월이다

일찍이 내게
소리 없이 붙잡혀
붉은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이
슬쩍 빼앗기는 것이
사과의 미덕이라고 알려 준

알 듯도 한 그 사람
---「훌륭한 밀월」중에서

내 귓속에 사는 그녀는 토막 난 말들을 잔뜩 부려 놓고 심술을 부릴 때도 있어 그녀가 부풀린 말이 줄어들지 않아 밤새 거품을 지우느라 하얗게 날을 밝힐 때도 있었지 그녀가 튀긴 얼룩은 여러 색깔로 변해 내 몸에 이상한 지도를 그려 놓고 귓바퀴가 울리도록 깔깔대며 데구루루 구르지 부메랑은 왜 다시 날아드는지 알아?네가 던진 말이 그리워서 네 가슴에 별처럼 박히고 싶은 거야 내 귓속에 사는 그녀는 심술보가 커서 입이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말들을 집어삼키지 얘야, 말은 퍼 나르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깊숙이 가두는 거란다 그래야 가끔씩 넘나드는 햇볕과 바람과 구름이 너를 단단하게 감싸 준단다
---「귓속의 그녀」중에서

아무도 선수를 선수답게 대접해 주지 않았지만
엄마는 선수였다?

살아 있는 날은 계속 삼진이었지만
죽음 앞에서 멋진 홈런을 날린 거다

죽음을 몇 번 연습한 우리는
세상의 공명으로 떨리는 새가슴을 움켜잡으며
엄마의 뜨끈한 희생타를
오래 끌어안고
이렇게 떨고 있다
---「메이저저리거」중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작은오빠가 꿈속을 자주 기웃거렸다 큰오빠는 종일 전축을 끌어안고 더그린그린그래스오브호옴이 대청마루를 훑는 동안 나는 두꺼운 책에 코를 박았다 언니는 상방 방구석에 틀어박혀 서울에서 온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오붓하게 불러 오던 언니 배가 찬송가가 펼쳐진 풍금에 닿았고 건반 위로 아카시아꽃이 자꾸 떨어졌다 나는 세계 명작동화를 옆구리에 끼고 철 가면을 썼다가 폭풍의 언덕을 오르내렸다가
---「비봉길 초록 대문」중에서

힘을 다해 꼭대기까지 뽑아 올린 불안들이
굴풋한 소리로 붉게 익어요
내 사과는 긴장하면 할수록
시도 때도 없이 맑은 과즙을 만들어내요
---「사과나무 아래」중에서

발끝에 차이는 기억을 주우며
타오르던 꿈은 오늘도 유효하다
디아스포라의 갈피에 흔들리던 울음들 하나둘 일어서고
담을 넘은 광대싸리나무 그림자가 머리를 두르고
언제 흘러내릴지 모를 뒹구는 낱말들을 끌어안고
출렁 걷고 또 걷는다

걸.어.서.걸.어.서.닿.을.수.만.있.다.면.너.라.는.문.장.에.
---「덕수궁 돌담길이 문장이었으면」중에서

어제도 오늘도 말이 되지 못한 재의 날들이
바닥에서 꾸물대고
별들의 구릉 어디쯤 낙타는 나를 기다리고
내 울음을 받아 삼킨 눈이 붉은 낙타는
그렁그렁한 노을을 붙잡고

(중략)

뭇별을 꼬아 만든 나의 안드로메다는
성좌의 붉은 얼굴로 나를 비추고
계단은 바깥을 항해 흐르고 있다
왜 바깥인가

나는불안을얼마나사랑하는지밤의두얼굴은바깥이되고싶어안달이다서늘한새벽이머리를누르고몸속으로흘러드는더딘바람은언제태풍으로몰아치려는지나를별들의늪으로내몰고있는
---「검은 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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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어부의 아내」가 부르는 물의 노래는 기호 너머의 ‘갯냄새를 불룩하게 감춘 배꼽’에 탯줄이 이어져 있습니다. “설명과 부연과 변명이 필요 없는/너의 숨”을 쉬게 하는 「초록이」로서 「숨소리 닿는 저 깊숙한 곳」을 깨우는 시의 복식호흡이라고나 할까요. 언어와 세상에 포복하는 숨결을 통해 시인은 “새로운 글자를 쏟아 놓”(「나는 일요일마다 굿모닝랜드로 간다」)는 노래가 되어 “등에 따개비가 지은 집”을 이고 사는 붉은바다거북의 수고로운 일상을 지긋이 견디게 합니다(「목요일의 아일랜드」). 여기서 저는 ‘나는 어쩌다 어부의 아내가 못 되었는가’라는 물음이 탄식이기도 하고 성찰이기도 하며 새로운 음(音)에 대한 꿈이기도 하다는 걸 알겠습니다. 시인은 그 음을 걸음으로 시와 세상에 거름을 주고 있군요. “줄 것이 없는 내게/보여 줄 것도 없는 내게/광주리를 들고 걸어 들어오는/알 듯도 한 그 사람”과의 「훌륭한 밀월」에 슬쩍 저를 빼앗겨 보렵니다. “비밀이 자꾸 만들어지는 어둠”을 향해 망치를 든 「렌토」의 묵직한 타격음과 ‘깨진 유리 조각’들을 밟고 흔들리는 조팝나무꽃으로 눈부신 「왈츠 2번」의 우아한 도약음까지 동시에 지닌 「당신의 리듬을 매만져 봅니다」.
- 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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