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격월간지(당시)『隨筆과 批評』 1·2월 호에 〈눈물의 연유〉가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중앙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1993년 제주문인협회 기관지 『제주문학』에서 〈그림 속의 집〉으로 신인상을 받은 지 불과 3개월 만의 일이다. 당시 『隨筆과 批評』 주간이던 호남대학교 故 정주환 교수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글을 많이 써 본 분이라고 생각되어 〈눈물의 연유〉를 당선에 선합니다.” 붉은색 원고지에 초록색 사인펜으로 굵직하게 쓴 글씨에 압도돼, 순간적으로 정신이 얼얼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각인된 양 있다.
신인상에 응모해 결과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참이었다. ‘서신’이 곧 당선통지서였던 셈이다. 기뻤다. 교단에서 문학을 가르치면서도 나도 글을 썼으면 좋았을 걸 하고 열망해 오던 꿈이 마침내 이뤄진 게 아닌가. 아내와 그때 고등학생이던 두 아들로부터 격하게 축하 인사를 받았던 일이 어제의 일로 떠오른다. 그 순간의 일로 치환되면서 몹시 가슴 벅차다. 그렇다. 등단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등단 며칠 새, 지역에 수필 장르를 심어 놓아야 한다는 좀 당돌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일은 내 몫이라 여겼다. 쉰둘의 나이, 늦깎이로 등단한 것과 무관하지 않게 내 안에 너울이 일었던 걸까. 누구와 한마디 얘기를 나눈 것도 아니다. 별안간 문학회를 결성하는 일에 나서도록 나를 부추긴 건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주에 수필 문학단체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단지 그것이었다. 속도를 냈다. 조명철 선생님에게 뜻을 전해 흔쾌하게 동의를 얻으면서, 이미 수필로 등단한 김정택(세종의원 원장)의 응원을 받음으로써 가속 페달을 밟아 마침내 ‘제주수필문학회’가 1994년 5월 4일에 창립됐다. 오랜 시간이 흐르기도 했지만, 가물가물할 뿐 무슨 소명의식이 내 등을 밀었는지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로 그해 12월에 『濟州隨筆』 창간호가 나왔다. 김건영(재일교포), 故 강태국(제주대 교수), 고권일(삼성여고 교사), 김길웅(제주교육연구원 연구사), 故 김순택(제주대 교수), 故 김영돈(제주대 교수), 김정택(세종의원 원장), 서경림(제주대 교수), 故 양정보(초등 교장), 조명철(도 교육청 교육국장), 故 현화진(중등 교장), 故 홍순만(도 공보관), 홍판길(약사) 13인의 작품이 수록됐다. 그중 여섯 분이 유명을 달리했으니 인생무상을 무슨 말로 할까. 제주에 수필다운 수필을 쓰는 문학단체를 만들자고 버둥대던 그때를 회상하며 먹먹한 가슴 쓸어내릴 뿐이다. 언뜻 굽은 등을 펴며 살피거니, 그때 쉰둘이던 내 나이 어느덧 여든둘이 아닌가.
창간호에 〈어머님 전상서〉, 〈참새가 그립다〉, 〈일흔둘까지 살겠다〉, 〈이태리에서 걸려 온 전화〉 등 4편의 수필을 실은 나는 작품 앞 ‘작가 메모’에서 수필가로서의 포부를 넌지시 드러내 다짐했다. “밥 먹고 이빨 쑤시는 얘기라고 나무라기 쉬운, 그런 허접스럽고 전혀 일상적인 너스레여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새록새록, 그 얘기들이 아득한 관념보다 몇 곱절 낫다는 생각을 간직해 왔다. 소시민적이고 범상한 삶의 원형이 다 그러저러한 까닭이다. 여기다 내 추억의 세계를 접목해 놓으면 가슴이 뛴다. 어머니, 아내, 아이들 얘기를 그렇게 쓰고 싶다. 지치도록 써 갈 것이다.” 풋풋하다 할까. 아직 설익은 문장과 여문 감성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 안간임 하는 몸짓으로 꿈틀거렸던 것 같다. 아마 국어 선생이라고 내게 편집이 맡겨졌을 것인데, 창간호 발간 뒤 낙수를 그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첫 열매는 거두지 않는다고 한다. 열매를 예고할 때, 꽃을 따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보다 튼실하고 눈부신 결실을 위한 거부의 손길이다. 기다림이다. 그게 섭리라면, 우리는 그것까지 거부하며 대어든 게 된다. 첫 열매부터 거두어 버린 것이다. 조바심으로 가슴 설렌 탓도 있었지만, 한 울타리에다 심어놓고 보니 ‘열여섯 그루의 나무’ 모두가 성과수(成果樹)였던 때문이다. 무얼 기다리랴. 서둘러 몸을 풀고 말았다. 어차피 분만 뒤엔 출산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인 것을….”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