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시야는 식민지 조선 한반도와 조선총독부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일본과 중국의 변동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동아시아 변동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 미국, 소련 등 각국과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세계정세에도 크게 주목했다. 일제하 좌우의 민족운동가와 민족엘리트들은 식민지의 고립된 지식인 엘리트가 아니라, 제국 일본의 지식인과 엘리트, 더 나아가 세계의 지식인과 엘리트들과 배우고 교류하고 소통하는 세계인 이었다. 조선의 민족운동을 주도하던 그들은 서구의 정치나 이념상황에 대한 파악과 소개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 p.56
동아일보가 일제침략을 옹호한 친일행적을 보이는 것은 1936년 ‘손기정선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장기간 무기정간에 처해진 후에, 일제의 압박에 의해 경영진과 편집진을 대거 교체하고, 일제 언론통제정책에 굴종하면서부터였다. 중일전쟁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친일주장을 전개했다. 그렇지만 1920년 창간부터 1936년까지는 달랐다. 일제하 동아일보에 대해서 일반적 대중신문으로 보면 큰 오산이다. 동아일보는 창간시 사시로서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라고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이는 민족운동의 선전기관이라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 p.57
1920년대 전반 동아일보의 사설과 논설을 주로 집필한 것은 논설반이었는데, 논설반을 주도한 것은 국내 상해파 사회주의세력이었다. 1920년 전반 동아일보는 이상협 편집국장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세력이 한편에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가 있었다. 중간에 송진우가 사장으로서 이들을 아울렀다.
--- p.37
송진우의 ‘자유권과 생존권’ 주장은 ‘자유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의 통합을 구했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 신자유주의--- p.New Liberalism)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가 결국 자유주의의 수정이자 자본주의의 체제내적 사상인 것처럼, 송진우의 자유권과 생존권 주장도 병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민중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일정하게 받아들이는 민족주의운동의 일정한 수정을 통해서, 합법적 정치운동을 전개하는 일부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운동을 민족--- p.주의)운동 내부로 포괄하겠다는 주장이었다.
--- p.190
이런 사실은 합법운동이 곧 타협적 운동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합법의 틀을 유지하면서 합법적 정치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곧 일제와 타협하는 것은 아니다. 합법적 영역에서도 비타협적으로 투쟁할 수 있으며 신간회 역시 그러했다. 광범한 대중을 망라한 대중정치운동을 위해 합법적 정치운동이 고려되는 것이고, 광범한 대중정치운동을 위한 합법적 정치운동은 세계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사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되어 왔다.
--- p.211
동아일보계열은 1926년 후반의 시점에 국제정세가 다시 변화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중국에서 국민당의 북벌은 ‘본질적 대혁명’으로 국민혁명군이 중국을 통일하면 중국은 아시아 제민족의 중심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 하면서 중국의 변화에 주목했다. 또한 일본에서 무산정당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 비록 일본 무산정당이 과반수 의석을 점하는 것은 요원하지만,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는 세력으로 ‘불원한 장래’에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 p.340
1926년 9~10월의 소위 ‘연정회 부활’로 나타난 정치단체 결성 추진은 일제의 공작에 의해 진행된 자치운동이 아니라, 국제적 정세의 변동에 고무된 민족주의세력이 1925년 하반기 이래 추진해온 민족적 중심단체, 민족운동의 정치조직을 결성하려는 구체적인 활동의 결과였다.
--- p.381
1930년대 전반 동아일보의 사상혁신, 문화혁신 주장에 대해 당면이익 획득을 위한 개량적 주장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들 주장의 특징은 민족주의가 조선 민족의 지도원리이자, 사상혁신의 기준이라는 것을 제기하면서, 민족운동이 민족주의에 입각해서 전개되고 통일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상혁신을 위해서는 조선만의 사상을 마련해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타의 존재를 연구하기 보다는 먼저 조선 자체를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는 단순히 과거의 문화를 연구하여 진흥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 정신을 기반으로 한 자기를 발견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조선학운동은 단순한 학술운동이 아니었다. 서구 근대사상에 비견하는 새로운 조선의 근대사상을 재발견하고 마련하기 위한 기초운동이자 사상운동이었다. 이는 서구의 근대사상을 일정하게 수용하면서도 이에 대신하여 새로운 근대적 중국사상을 정립하려고 했던 20세기 전반의 중국 국학파, 량치차오--- p.梁啓超)와 그의 연구계, 신유가와 1930년대 중국 본위문화운동 등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비록 중국만큼 폭넓고 깊게 연구되지는 못했지만, 식민지 조선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또한 중국과는 다른 학문적 전통과 역사적 배경 속에도 새로운 근대적 조선사상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 p.498~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