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은 위에서 언급한 세 단계의 역사기술 외에도 동심원적인 배열을 보인다. 시나이산에서 받은 하느님의 계시를 중심에 놓고(탈출 19장?민수 10,10)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는 여정으로 둘러싼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 세대인 족보적 선사 시대를,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을 설명하는 책으로서 오경의 가장 바깥을 에워싼다. 이 두 책은 저마다 야곱이 열두 아들을 축복하고, 모세가 열두 지파를 축복하는 것으로 끝난다(창세 49장; 신명 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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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은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그리고 그 너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Anderson 2017, 171-179). 오경의 율법은 … 오늘날의 성찰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윤리적 지혜를 담고 있다. 오경은 우주를 유일하신 우주적 하느님의 피조물로 제시하고, 하느님은 인류와 계약을 맺으시고, 가장 힘든 갈등에 처한 인간들과 열정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생명과 복을 가장 풍성히 내려 주시고, 억압받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이런 것들이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윤리의 이유이자 목표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다.
--- p.63
가정은 하느님의 계획과 약속에 결정적이다. 이 점은 위에서 언급한 형제들의 세대를 통해 부분적으로 표현된다. 남성은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어머니들과 자매들이 모든 세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창세 3장에서 역동적 인물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다. 신학 전통에서는 종종 하와를 인류 최초의 죄인이자 유혹자로서 부정적으로 보았다. 인류에 지식을 가져다준 이는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아담이 아닌 하와이며, 그녀의 행동으로 인류가 인간이 된다. 선조들의 아내들은 이따금 가부장적 권위의 한계와 억압에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 나타난다.
--- p.87
그리스도인에게 창세기란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타락’을 의미하고 미래의 구원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창세 1장의 천지창조에서 성부와 성령이 연상되며, 창세 22장의 ‘이사악의 희생’(유다 전통에서는 ‘이사악의 결박’으로 부른다)에서 그리스도가 예고된다. 이슬람에게 창세기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의 이사악에 반대되는, 이스마엘이라는 그들 정체성의 중심인물의 이야기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슬람교, 유다교, 그리스도교에게 창세기는 각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서로 구별되는 정체성을 세우는 근거가 되었다. 동시에 창세기는 세 전통 모두에 신앙의 모범, 곧 아브라함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제시한다.
--- p.93
“영원한 계약”(7.13.19절)은 기원전 6세기 예언서에 나온다(이사 24,5; 55,3; 61,8; 예레 32,40; 50,5; 에제 16,60; 37,26). 이 표현은 6절(“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16절 참조)과 함께 다윗의 왕권 이데올로기(2사무 23,5; 이사 55,3의 다윗에 대한 언급 참조)에서 기원했을 수 있다. 노아의 계약(9,16)에도 P의 “영원한 계약”과 동일한 표현이 적용되었고, 사제계 전승의 세계사에서 핵심 사건인 시나이산 계약(탈출 31,16, 레위 24,8)에도 동일한 표현이 사용될 것을 예고한다.
--- p.156
야곱의 새 이름은 이스라엘이 될 것이며, 여기에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었다(sry: 싸웠다)”라는 말놀이를 덧붙여 설명한다(28-29절; 역자주: 《성경》은 다소 의역했다). 이 말놀이는 새 이름인 이스라엘(‘엘/하느님은 싸우신다’)의 어순을 뒤집어 하느님을 목적어로 삼고 ‘사람’이라는 말을 추가한 것이다. 새 이름을 얻은 야곱이 하느님과 사람들 모두와 싸우는 존재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는 야곱-이스라엘 자신의 미래의 체험을 알려 줄 뿐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불릴 백성의 운명도 예고한다.
--- p.206~207
이 시는 창세기의 끝을 “이스라엘 지파들”(28절 역자 직역; 참조 7절의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으로 표시한다. 원래는 더 오래된 지파 담론을 이어 붙인 작품일 수 있지만(신명 33장 참조), 이 시는 전체적으로 열두 지파가 땅에서 한 가정을 이루어 함께 사는 모습을 전망한다(시편 133,1 참조). 이 시는 야곱-이스라엘의 삶의 끝을 가리킨다. 창세기부터 열왕기 하권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기술historiography에서 위대한 인물들의 삶의 끝에는 이런 시가 삽입된다(모세의 죽음을 표시하는 신명 32장과 33장; 다윗의 삶의 끝을 향해 가는 2사무 22장과 23,1-7). 이런 시들은 산문 본문에 마침표를 찍고, 이스라엘의 ‘역사적’ 체험에서 기억되는 중요한 순간을 나타낸다.
--- p.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