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루에겐 어쩐지 이 모든 상황이, 모아가 유치원에 처음 갈 때와 똑같이 느껴졌다. 한시도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모루와 모아는, 모아가 유치원 입학하던 날 처음으로 오랜 시간 떨어져 있게 됐다. 그날은 모아만큼이나 모루도 불안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몰라.’
다른 토끼와 비슷했던 모루의 몸이 곰처럼 커졌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익숙지 않은 두려움이 자꾸만 무언가를 먹게 만들었다. 쉬지 않고 먹는 모루의 식욕은, 모아가 유치원에서 돌아온 오후 네 시에야 겨우 멈췄다. 작은 흰토끼는 점점 몸집을 불려, 곰처럼 큰 덩치의 소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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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물웅덩이야? 계곡이야? 뭐가 저렇게 끝이 없이 커?”
랭보의 혼잣말에 모루가 답했다.
“저건 바다야.”
모아는 모루에게 바다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세상의 모든 물이 다 모여 바다로 흐른다고. 바다는 온갖 생물들이 사는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이라고.
“바다에선 검은 무지개가 뜨기도 한대.”
모루의 말에 희미하게 눈을 뜬 무무가 그 말을 따라 했다.
“바다에 뜨는 검은 무지개?”
바다에 검은 무지개가 뜬다고 알려준 것도 모아였다. 모아와 함께 본 무지개는 항상 알록달록했기에, 검은 무지개는 대체 어떤 느낌일지 모루는 늘 궁금했다. 그들은 이 바다를
쭉 따라가면 검은 무지개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바다엔 거대한 바람개비가 수도 없이 돌고 있고, 밤이 되면 멀리 나간 배들에 길을 알려주는 성냥불이 칙, 칙 하고 켜진대.”
“바다 위의 바람개비. 방향을 알려주는 성냥.”
무무가 잠꼬대처럼 모루의 말을 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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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은 달리는 버스로 하나둘 올라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자머리는 생각했다.
자신만 멈추면 친구들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낱낱이었던 그들이 함께 걸으며 길을 냈던 순간도 떠올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구름 이야기를 나누며 평화롭게 구름을 관찰하던 시절도 떠올랐다. 머지않아 숲에는 수국이 잔뜩 피겠지. 수국은 사자머리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함께 숲을 가꾼 후 처음 맞이하는 여름과 가을의 풍경이 어떨지도 궁금했다. 모루와 조금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느리지만 누구보다 꾸준히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녀석. 그 녀석과 함께 있으면 분명 포레스트 어글리는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다.
‘떠나려 하니 그립네.’
사자머리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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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보자.”
“그래, 내일 보자.”
모두가 서로에게 인사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파다닥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뭐가?”
모루가 물었다.
“저 말. 내일 보자는 말. 난 저 말 되게 싫었거든. 내일도 버림받은 채 여기 남아있게 될 거란 저주의 말 같아서.”
그랬다. 내일 보자, 는 말은 이 숲에서 가장 서글픈 인사였다. 곰토끼 모루가 이곳에 나타나기 전까진. 하지만 함께 도시로 모험을 떠났다 돌아온 친구들에게, 여전히 이 숲에서 새로운 형태의 희망을 찾아가고 있을 동물들에게, 파다닥은 이 말이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내일 보자. 우리 꼭 내일 보자. 모레도, 그다음 날도 꼭꼭 보자!”
랭보가 지긋지긋하다며 나무 위로 뛰어 올라갔고, 사자머리는 귀찮은 척 파다닥을 피해 숲으로 들어갔지만, 모루는 그들의 표정 역시 같은 인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파다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모루 네가 물었잖아. 닭싸움하던 시절이 행복했냐고. 생각해 보니, 싸우는 게 행복했던 게 아니었어. 싸워서 이겨야 주인에게 칭찬받으니 싸웠던 것뿐이야. 노래를 해야 칭찬받았다면 노래를 했겠지. 가끔 옆에서 동료가 죽어 나가기도 하는 잔인한 닭싸움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
모루가 서글픈 표정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지금 파다닥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리고 네 말대로 상대가 다치든 말든 상관없는 마음은 사랑이 아닌 게 확실해. 오늘 그걸 깨달았달까. 지금 다시 나에게 돌아가고 싶은지 묻는다면, 확실히 답할 수 있어. 아니,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리고 파다닥은 덧붙였다.
내일 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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