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마르크.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이 정도면 나라를 뜰 수도 있을 거야. 아직 뜰 수 있다면 말이지.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 재산을 지키고 싶었다. 이렇게 졸지에 뺏길 순 없어. 암, 안 되지.
다 잘된다면 내일 베커가 8만 마르크를 가지고 올 거야. 그는 희망에 부풀었다. 거기에 더해 집값으로 1만 마르크를 현금으로 받아. 운이 좋으면 손해를 좀 보더라도 저당권을 팔 수 있을 테지. 질버만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여전히 꽤 부자야. 그는 이런 결론을 냈다. 가난한 반유대주의자들은?가난한 반유대주의자들이 정말 아직도 있다면?온갖 단점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유대인이랑 처지를 바꾸려고 할 거야. 이런 상상을 하자 마음이 좀 가벼웠다. 그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번 해봐야 해. 하지만 그들이 왜 처지를 바꾸겠어? 돈만 빼앗으면 부유한 반유대주의자가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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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에 도착해 다급하게 문을 잠그고, 생각에 잠기려 침대에 몸을 던졌다. “유대인이 맞더군요.” 싸늘하게 설명하는 종업원 목소리가 들렸다. “유대인이 맞더군요…….” 종업원에게는 물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유대인 체포란 손님이 주는 팁처럼 지극히 평범한 일상다반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유대인이 체포됐다. 유대인이라서.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종업원이 볼 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기 묵으면 안 되겠다. 질버만은 이렇게 결심하고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넓은 객실을 둘러봤다. 여기서는 절대 자면 안 돼. 어쩌면 한밤중에 나를 침대에서 끌어낼지도 몰라. 그러는 와중에 소음이 약간 발생하면 투숙객들이 깨서 문을 열고 룸메이드에게 무슨 일인지 물을 테고, 그러면 아마 이런 대답을 들을 것이다.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방금 유대인 한 명이 체포됐어요. 그게 다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겠지. “아, 그렇군요……. 그런데 체포하면서 이렇게 요란스러워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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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게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노래 부르며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흐느껴 울고 싶을 때도 가끔 있었어요. 정말입니다. 모두 오래전부터 알던 지인이었어요. 전우 모임, 카드놀이 클럽, 동업조합 등이었죠. 저쪽은 모두 예전 친구인데, 당신은 홀로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신과 뭔가 함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당신이 그들 중 한 명을 만나면, 그가 모른 척하는 모습을 안 보려고 당신이 먼저 고개를 돌린다고 말이지요. 저는 어디로도 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또 속을 끓일 거라고 늘 생각했지요. 저 아이와는 함께 학교에 다녔고, 또 다른 사람과는 직업교육을 받았거나 단골 술집에서 같이 술을 마셨는데, 지금은? 지금은 당신이 형체도 없는 공기가 된 겁니다. 나쁜 공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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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자, 이제 당원증을 보여주시오!”
뚱뚱한 남자의 마지막 말은 날카로운 명령이었다. 노동자는 마지못해 주머니에서 당원증을 꺼내 상대에게 내밀었다.
뚱뚱한 남자는 당원증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소. 앞으로는 행동 조심하시오! 당신에게도 적용되는 조언이오!”
그는 여자에게도 말한 뒤 서류 가방을 들고 객실을 나갔다.
모두 놀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하마터면. 질버만은 생각에 잠겼다. 심장이 쿵쿵 두방망이질했다. 위험이 가장 적다고 믿기만 하면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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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독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는 난민이에요. 유대인이라고요. 체포될 위기였습니다. 나를 강제수용소에 가둘 거예요.”
“우린 당신이 여길 통과하게 둘 수 없습니다. 따라와요!”
남자가 질버만의 팔을 잡고 숲으로 데리고 가려 했다.
질버만을 발견한 경찰은 둘이 이야기하게 두고, 질버만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질버만은 큰길에서 멈춰 섰다.
“가지 않을 겁니다! 여기 남겠어요! 당신들은 이럴 권리가 없어요. 이러면 안 됩니다! 지금 나는 자유국가에 있는 겁니다!”
“당신은 불법으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쫓기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모든 사람이 벨기에로 올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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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 유대인이 너무 많군. 질버만은 생각에 잠겼다. 이러면 우리 모두 위험해질 텐데. 당신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화롭게 살수 있었을 거라고. 당신들 때문에 내가 불행 공동체에 빠져버렸잖아! 나는 보통 독일 사람과 다른 점이 전혀 없지만, 당신들은 정말 다를지도 몰라.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고. 그래, 당신들이 없었다면 나는 쫓기지도 않을 거야. 평범한 시민으로 살 수 있을 텐데. 당신들 존재 때문에 나는 뿌리 뽑힐 거야. 우리는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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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버만이 일어나서 말했다.
“여기 있지 않을 거야. 떠날 거라고……! 7시에 아헨 행 기차가 떠나……. 8시 10분엔 뉘른베르크 행이……. 9시 20분엔 함부르크 행이……. 10시엔 드레스덴 행이……. 기차가 아주 많지……. 수없이 많아……. 난 떠날 거야!”
“그거 너 속임수지.”
슈바르츠가 확신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와. 같이 소리치자. 유대인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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