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1년 03월 08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84쪽 | 416g | 127*193*28mm |
ISBN13 | 9788934991946 |
ISBN10 | 8934991941 |
발행일 | 2021년 03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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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84쪽 | 416g | 127*193*28mm |
ISBN13 | 9788934991946 |
ISBN10 | 8934991941 |
여행자라고 하는 건 모름지기 돌아올 곳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돌아올 장소가 없는 사람을 여행자라고 할 수 있을까. 영원히 떠도는 사람. 그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없는 사람. 마땅히 돌아올 장소가 없다면 그의 앞에 죽음 외에 뭐가 있을까.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던 ‘수정의 밤‘ 무렵 사업가인 한 유대인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그 순간의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참여했던 오토 질버만은 사업가이자 유대인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스스로 독일인이라 여기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유대인으로만 본다. 다만 그는 이름을 빼고는 아리아인의 외모를 가졌다. 그는 아들이 있는 프랑스로 가고 싶다. 프랑스에 있는 아들에게 거주권을 알아보라고 하지만 쉽지 않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리아인은 터무니없이 싼 값으로 집을 사려하고, 동업자인 아리아인은 그를 배신한다. 아내는 아리아인 오빠에게로 향하고 돈을 여행 가방에 넣고 그는 독일을 떠돈다. 기차에서 군인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일등칸을 탔으나 많은 유대인들이 일등칸에 있는 걸 보고 그는 이등칸과 삼등칸을 헤맨다.
어디에라도 숨고 싶은 그는 사업상 자주 다녔던 호텔에 가지만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다. 가진 돈은 많지만 그는 어디에도 마음 편하게 머물 수 없었다. 그와 관계했던 독일인들은 이제 그가 유대인이라며 피한다. 아내의 오빠가 힘들 때 보증을 서 주었어도 자신의 여동생은 자기의 집에서 머물 수 있으나 유대인인 그에게 내줄 방은 없다고 거절한다.
오토는 돈이 필요한 젊은이의 도움을 받아 벨기에의 국경을 넘으려고 하지만 벨기에의 경찰에 발각되어 다시 독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가 내민 뇌물을 제발 받아주고 그를 구해주길 바라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을 회유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숲을 넘어 다시 돌아온 그에게 독일은 그가 살아온 터전이 아니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배제했고 유대인에게 독일은 그저 넓은 강제수용소에 지나지 않았다. 유대인이면서 다른 유대인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그가 얼마나 아리아인이고 싶은지 알 수 있다.
기차에 유대인이 너무 많군. (중략)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거라고. 당신들 때문에 내가 불행 공동체에 빠져버렸잖아! 나는 보통 독일 사람과 다른 점이 전혀 없지만, 당신들은 정말 다를지도 몰라.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고. 그래. 당신들이 없었다면 나는 쫓기지도 않을 거야. (251페이지)
독일에서 살고 있는 그들은 독일인이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종 청소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인 오토 질버만이 기차를 타고 독일을 헤매는 중 그는 유대인들을 경멸하고 자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자기가 이런 취급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다른 하층민들과 달리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많은 부를 누리고 있었다. 그가 살고 있던 집은 11만 마르크에 달했다. 보통 젊은이들이 결혼하는데 천 마르크가 있으면 어느 정도 가능한 돈이었다는 점이다.
작가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가 유대인 박해 사건인 ‘수정의 밤’ 소식을 들은 후 쓴 두 번째 소설이며 영국과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었다가 80년 만에 다시 태어난 작품이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보다 먼저 쓰인 작품으로 보다 직접적인 유대인 박해 사건과 그것을 겪는 사람의 마음들을 볼 수 있었다.
독일의 아픈 역사를 유대인의 시각으로 볼 수 있었던 작품으로 오토 질버만이 겪는 그 모든 감정에 공감하며 읽은 작품이었다. 절망뿐인 상황에서도 일말의 희망을 품어 보는 그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수많은 질문을 건네는 장면에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가 애타게 머물 곳을 찾을 때 무심했던 사람들이 어디 그들뿐일까. 지금의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게 슬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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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고 자동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융페른슈티크에 도착한 그는 알스터 강으로 다가가서 잿빛 강물을 잠시 노려봤다. 어둡게 흘러가는 수면에 반사된 가로등 불빛을 보다가 심호흡을 했다. 차갑고 축축한 바람에 머리가 맑아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질버만은 혼잣말을 했다. 어려움에 처하고, 귀찮은 일을 당하는 건 맞아. 하지만 다시 편안해질 거야. 그냥 이주해도 되고. 사실 그다지 나쁜 상황은 아니야. 살아 있으니까. 그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으니까. p.83
기차를 배경으로 한 표지 이미지에 '여행자'라는 제목을 하고 있지만, 이 작품 속에서의 '여행'은 우리가 알고 있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 외에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혹은 어떤 위험을 겪게 되더라도 결국은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 든든한 보험처럼 우리를 심리적으로 지켜주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돌아갈 곳이 없다면 어떨까. 끝없이 계속 움직여야 한다면 말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인 질버만은 기차를 타고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도르트문트로, 아헨으로 독일 전역을 돌아다닌다.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제 여행자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현실 속에서, 여행이라기보다는 그저 기차를 타고 움직이고 있는 남자. 그는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만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낀다. 너무도 피곤하지만, 갔다가 왔다가, 왔다가 갔다가 반복하며 여행하는 동안 자신은 지금 독일에 있는 게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질버만의 시선이 다시 젊은 노동자를 향했다... 노동과 더 높은 임금과 생존을 위해 쉴 새 없이 싸우느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느끼지 못해. 이 사람들은 청춘이 없어. 열네 살이 되면 이미 싸움이 시작되는데 늘 존재 자체가, 그저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나도 마찬가지야. 죽음이 바짝 쫓아온 게 보여. 하지만 죽음보다 항상 더 빨리 달리기만 하면 돼. 서 있으면 가라 앉고 부패한다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야 해. 사실 나는 언제나 달렸어.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잘 뛰어야 하는 지금 이렇게 힘겨울까. p.211
1938년 11월 독일에서 대규모의 유대인 박해 사건인 일명 ‘수정의 밤’이 벌어졌고, 이 소식을 들은 작가는 사 주 만에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두 번째 소설 《여행자》를 써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수십 년 동안 독일국립도서관 문서실에 잠들어 있다가 2018년에야 저자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출간되었고, 《안네의 일기》(1942~1944)보다 앞서 집필된 유대인 당사자가 쓴 최초의 소설인 만큼 기념비적인 고발문학으로 주목받았다. 사건 당시 수많은 유리창이 깨졌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수정의 밤(Kristallnacht)’에 나치 돌격대와 지지자들은 도끼와 쇠망치로 무장하고 수천 개의 유대인 상점을 깨부수고 약탈했으며, 당시 유대인 3만명 이상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극중 성공한 유대인 사업가였던 질버만은 하루아침에 도망자로 전락한다. 독일에서 나가야 했지만, 사실 갈 데가 없었다. 특히나 질버만은 전형적인 약자나 희생자가 아니라는 점이 인상적인데, 나치의 탄압이 시작되기 전에는 자본가로서 기득권 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살아왔던 그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스스로는 다른 유대인들과 엄연히 다르다고 여기고 있다. 유대인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기 전에는 그와 가족에게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기에, 수정의 밤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 그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라 당시의 독일 풍경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었다. 작가 역시 나치를 피해 유럽을 떠돌다 스물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끝내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원고가 모국어로 출판되기까지 80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게 된다.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 이름 없는 희생자들에게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도,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역사적 증언을 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제부터 유대인이 완전히 이방인이 되어버린 현실을 확연히 드러내고 싶기도 하군. 나를 과거와 똑같이 대하는 인간들에게. (19p)
도망자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살던 사람이었다. 남들처럼 그렇게 살던 사람이었다. 그 나라에 살던 다른 사람들과 겉모습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흑인과 백인처럼 확역한 차이를 드러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버렸다. 어제까지 자신을 친구로 대하던 사람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친구 뿐인가 가족도 자신을 외면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은 단지 그가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그 이유뿐이었다. 그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 자신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자신이 성형수술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피까지 모조리 바꿀 수는 없지 않은 일인가 말이다. [주홍글씨]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사람들이 단지 그 여자의 표시만 보고 그녀를 외면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들이 하던대로 그들은 단지 맹목적으로 표시를 붙였고 외면했고 손가락질 했다. 그 작품에 나온 것과 하등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질버만은 빨간 알파벳이 찍힌 여권을 가지고 어디를 갈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자신의 나라에서조차도 갈 곳이 없는데 말이다.
내 여권에 빨간색 'J'가 크게 쓰여 있으니까요. (271p)
난민
[아메리칸 더트]를 생각한다. 가족을 모두 잃고 카르텔에게 쫓기던 그녀는 아들과 함께 자신이 살던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단지 걱정이 되는 것은 자신이 어디를 가도 카르텔의 손길이 뻗어올 것이기 때문에 어디도 마음대로 갈 수가 없다는 현실이다. 비행기를 타려 해도 기록이 남는다. 그들이 자신들을 쫓아올 것은 자명한 일이다. 숨어야 한다. 하지만 숨을 곳이 없다. 결국 그녀의 선택은 난민이었다. 불법으로 남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여기 질버만도 그녀와 동일한 생각을 했다. 일단 가진 돈은 있다. 이 돈을 가지고 국경을 넘으려 했다. 자신에게 조여오는 올가미를 피해서 말이다. 아메리칸 더트의 그녀는 성공을 했지만 질버만에게 그런 좋은 운이 계속 따라줄까. 만약 그가 국경을 넘는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인생이 그에게 펼쳐질까. 프랑스에 있는 아들에게서 허가서를 받았다면 또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나라에도 난민 문제가 중요한 이슈이다. 누군가는 그들을 받아 들여서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그들까지 다 받아들일 여력은 없다고 이야기 한다. 어느 누가 맞다고 손을 들어주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떻게 보면 나조차도 그런 분야에 회색을 띠고 있다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 사실이다. 당신의 선택은 어떠한가.
유대인 피가 독일 민족에 들러붙은 꼴 아닙니까. (29p)
여행자
여행이란 얼마나 즐거운것이던가. 갈 곳을 정하고 교통편을 예약하고 계획을 짜고 짐을 싸는 것조차도 다 즐거운 준비작업에 속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즐거움을 우리는 빼앗겼다.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에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이동을 자제하는 판에 타국으로 나가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 버렸다. 만약 간다 하더라도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긴 시간의 격리시간이 필요하다. 예전처럼 짧게 갔다 왔다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소리다. 만약 여행이라는 것이 타의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과연 진정한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여기 질버만은 뜻하지 않은 여행자가 되어 버렸다. 자신이 살고 있던 곳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곳을 벗어나야 했고 이동을 해야만 했다. 자신의 종착지는 정하지 못했다. 그저 생각나는대로 즉흥적으로 갈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 그곳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그곳에 간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 그래서 또다시 이동을 한다. 기차는 일등칸부터 삼등칸까지 다양함을 보여준다. 흡사 질버만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정도 돈이 있고 집이 있고 멀리서 공부하는 아들이 있고 아내가 있던 그였다. 그는 왜 이런 여행자 신세가 되어야 했나.
나와 당신들이 다른게 뭔가. 우리는 정말 무서울만큼 닮지 않았나.(302p)
'하일 히틀러'라는 인삿말로 작가는 시대상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시대인지 우리 모두가 아는 그 때 말이다. 이 시대를 다른 작품처럼 직접적으로 독일군의 박해라던가 유대인의 죽음을 다루고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가볍게 그려지고 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심각함 없이 그저 단순히 질버만이라는 사람의 뒤를 쫓아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절박함이 둔화되지는 않는다. 질버만의 입장에서 보라. 그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 아니던가. 단지 생김새로 또는 자신의 조상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차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그때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사람이던가 아니면 도망자인가, 난민인가, 그도 아니면 여행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