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꽃 저 상고대
지부상소(持斧上疏) 올린 갑다.
책을 엮은 그 가죽끈 세 번이나 끊어지고 과골삼천(?骨三穿), 과골삼천, 복사뼈 세 번이나 슬픈 구멍 뚫렸는데…. 물경 이십 년 가까이 책상다리 틀고 앉아 책 읽고 글 쓰다가 어이 하리, 어이 하리. 다산 선생 어이 하리. 방바닥 구들마냥 에라 허허 복사뼈에 구멍 숭숭 뚫렸는데,
천지도 모르는 그대
깨춤이나 춘단 말가?
---「깨춤」중에서
산에 들에 가려움증, 잎눈 뜨는 가려움증
따지기때 들머리에 저승 야차 다녀갔나?
삼이웃 뜰썩하도록 곡지통을 내쏟는다.
눈물 콧물 버캐 자국, 돌니 박힌 벼랑길에
휘진 몸 끌고 오는 봄의 전령 오리궁둥이
가근방 짜하게 번지는 볕뉘 상큼 부려놓네.
비루먹은 꼬리 흔드는 황소거사 영각 켠다.
새도록 가전체 쓰는 꽃의 눈빛 적바림하고
숯검정 다 된 작약도 입귀 절로 벌고 있다.
---「가전체(假傳體)로 오는 봄」중에서
저 널룬 뻘밭에서 ‘뻘징역’ 살고 있제라.
숨이 그만 칵칵 맥혀. 한번 뻘밭 들어가문 못 나와, 좀체 못 나와. 오뉴월 뙤약볕 아래 발 푹푹 빠지는 생지옥 뻘밭에서 치러내는 극한투쟁. 뻘배 아니면 들어갈 엄두도 못 낼 차진 뻘밭에서 널을 타제, 널을 타. 길 없는 무저갱 속 짚디짚은 구렁텅이 개펄 밭에 길을 내는 동력의 근원. 왼 무릎은 널 위쪽 똬리에 단단하게 붙이고, 오른발은 헤엄치듯 그침 없이 지옥 뻘밭 헤집제. 온몸이 갯벌하고 한통속 되야갖고 뻘바닥 뒤집어야 게우게우 끄집어 올릴 수 있는 거이 맛조개, 맛조개라. 허벌나게 맛 좋은 맛조개라, 하먼…. 어느 한 날 뻘투성이 흙투성이 험한 세월 마다해 본 적 있나?
뻘바닥 무릎걸음하고 한 생애 버텨 왔제라.
---「와온 갯벌」중에서
독을 퍼다 독 죽이는
독은 결코 독 아니야.
복어회에 복어 독을 거짓말처럼 얹어설랑 혀를 톡 쏘는 맛 즐기는 쾌감, 삶이라는 음식 위에 죽음이라는 소스 살짝 덧입히는 시도랄까. 그야말로 저릿저릿 오금 못 펴게 하는, 희열의 극치 아니겠어? 광대버섯이 품고 있는 무스카린 말씀이야. 그게 글쎄 부교감 신경 흥분시킬 때 흰독말풀에 함유된 아트로핀으로 진정시킬 수 있는 이치 같은 거야. 일테면 중독도 가능하고 해독도 가능하단 말씀이야. 죽였다 살릴 수 있고, 살리고자 죽일 수 있단 말씀이야. 아으 몰라, 다롱디리…. 독살의 역사에서 책을 이용하는 전설적 방법 알고 있남? 갈피마다 독을 묻혀 손끝에 침을 발라 한 장 한 장 책장 넘기면서 그걸 읽을 때 말씀이야. 독이 그만 몸속으로 스며들어 목숨 앗는 수법 말씀이야. 책 내용 재미있으면, 허벌나게 재미있으면 그 사람 그만큼 빨리 죽는 거야. 알고 보면 독을 안고 노는 사이, 독도 우릴 데리고 노는 거지.
그러게.
이참에 글쎄
살고 죽는 전율 만끽했지?
---「독의 계보 1」중에서
한길 가녘 무리 지어 노숙하는 질경이야.
밟히면서, 짓밟히면서 끝내 오뚝 일어서는 검질긴 질경이야. 차이고, 억눌리고, 골골 상처투성이로 능굴능신(能屈能伸) 죽었다 거듭나는 아찔한 저 결기. 에멜무지로 질긴 풀이, 너무나 질겨서 신경질 나는 질긴 풀이…. 중동무이 허리 꺾여도 시난고난 일떠서고 조삼모사(朝三暮四) 국개의원, 무뇌증(無腦症) 정치 앵벌이의 엉너리 따윈 떨쳐버린 흑보기 눈 지릅뜨는 질경이, 질경이야. 숨 쉬고 말하는 것조차 흘금흘금 눈치 보는 이 땅이 눈꼴 시려, 아서라 눈꼴 시려. 밭은기침 퉤 퉤 퉤 뱉고 온몸 부려 손사래 치는 질경, 질경 질경이야. 단기 알바 게거품 무는 빈손 털털 질경이야. 질경, 질경, 눈물 젖은 불가촉천민 질경이야.
맨발로 자존(自尊)의 땅을 와락! 움키는 질·경·이·야.
---「질경이 평전」중에서
온통 발가벗은 몸, 물감 풀어 덧칠했어.
화가는 지껄였지, 색이 빛의 고통이라고. 때로 화가는 고통을 떨쳐내려 색을 입혔어. 색은 빛의 환희이고, 색은 빛의 유희라고. 온몸의 유연한 굴곡 속속들이 살려내어 독이, 독이 약이 되는 환한 세상 그려낼 거라고. 아서라, 아서라 달궁…. 집 안팎에 심겨 있는 만병초, 은방울꽃, 수선화, 흰독말풀, 능소화, 천사의 나팔, 피마자, 투구꽃 따위 몽주리 독의 꽃, 독의 꽃이라지. 개중에는 껍질이나 잎, 뿌리에 피부가 닿기만 해도 독극물 번져났어. 뛰는 생선 붉은 아가미 들추고 번쩍이는 비늘 거스를 때 영매(靈媒)의 순결한 울음소리 들려오고, 들려왔지. 아서라, 아서라 달궁! 작두날, 시퍼런 칼날 에혀 에혀 작두거리 광기(狂氣) 어린 무녀(巫女)처럼 달의 이음새 아퀴 지어 둥글게, 둥글게 말아가듯
화가의 붓질은 끝내 빛의 환희 받아냈어.
---「독의 계보 10」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