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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심 씨의 인생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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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심 씨의 인생 여행

: 너무 늦지 않은 때에 엄마에게로 떠난 여행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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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1월 02일
쪽수, 무게, 크기 298쪽 | 388g | 128*190*20mm
ISBN13 9791197135347
ISBN10 119713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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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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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 댁네는 두 딸이 출가하고 하나 둘 손주가 늘어났다. 식구가 많지 않아도 어느덧 손주들이 다 장성해 명절 때면 집이 북적거렸다. 작은 집이 아닌데 자식들은 집이 좁다고 새집을 짓자고 자꾸만 졸랐다. 그럴 때면 송동 양반은 양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아들도 없는디, 나 죽으면 이 집은 어쩔라고? 느그들이 내려와서 살래?”
그러고는 자전거를 타고 쌔앵 집을 나가 버렸다.(...)

수년이 흐르면서 명절 때면 집 짓자는 이야기가 으레 나왔다. 큰 사위가 총대를 메고 새집을 짓자고 서울에서 빈번하게 전화를 해대며 설득했다. 큰 사위의 설득에 송동 댁은 “알아서 하소.”했지만 송동 양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딸도 아닌 사위의 설득에 송동 양반이 지금 있는 집은 허물지 않기로 하고 집 짓기를 허락했다. 두 딸 사위는 머리를 맞대고 이쁜 집을 지어 보겠다고 동분서주했다. 드디어 마당 한편에 있던 헛간채를 허물고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우고 황토 집을 짓기 시작했다. (...)

새 집을 짓고 나서부터 두 노인은 별거 아닌 별거를 하고 있다. 송동 양반은 헌집에서, 송동 댁은 새집에서 각자 생활한다. 송동 양반이 초저녁 잠이 많아 저녁 8시 반만 되면 불을 끄고 잠을 청하는 바람에 송동 댁은 좋아하는 연속극도 그동안은 못 보았더랬다. 큰딸에게 전화가 오면 이제야 소원성취한 듯 목소리가 밝았다.
“테레비도 마음대로 보고, 아이고 좋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송동 댁도 저녁 9시를 못 넘기고 TV는 저 혼자서만 떠든다. 시골 두 노인은 오늘도 밥은 헌집에서 잠은 각자 따로따로 잔다. 송동 양반은 사람이 안 살면 집이 못쓰게 된다고 항상 헌집에서 생활한다. 가끔 저녁에 내기 화투라도 칠 양이면 새집에서 티격태격, 그러다가 돈내기에 질 성부르면 송동 양반은 얼른 헌집으로 내빼 버린다. 오늘도 호동마을의 두 노인, 성수 씨와 길심 씨는 한 마당 두 집에서 별거 아닌 별거를 하고 있다. 별거가 별거겠나. 이런 별거라면 얼마든지 해도 좋을 듯하다.
---「시골 두 노인의 별거 아닌 별거」중에서

큰 솥단지에 초가을에는 부드러운 고구마 줄거리(보통 고구마순, 줄기)를, 깊은 가을에는 무를 나박나박 썰어 깔고 국물이 자작자작하게 지졌다. 특별한 양념이랄 것도 없이 아궁이에 불을 지펴 큰 솥단지에 지지면 그만이었다. 텃밭에서 바로 딴 빨간 고추를 갈아 넣고, 국물도 붓고, 장독대에서 가져온 간장 한 사발 붓고, 길심 씨 말대로 이것저것 손 가는 대로 찌클면(끼얹으면) 맛이 났다. 남아 있는 양념장도 찌클고, 밥상에 오르락내리락 안 먹는 반찬도 넣고 반찬통도 물에 헹궈 찌클었다. 간은 볼 필요도 없이 신기하게 딱 맞았다.

길심 씨 손맛에, 싱싱한 물고기에, 아궁이 솥단지에 지졌으니 얼마나 맛이 있었겠는가. 많던 국물이 자작자작해질 때까지 아궁이에서 불이 타올랐다. 불이 사그라들고 잔불에 뭉근하게 맛이 들어갔다. 처음 먹을 때는 아주 빨갛지도 않고 적당히 갈색 빛이 감도는 국물이 맛있었다. 그 다음 불을 지펴 데워 먹을 땐 간이 쏙 벤 무가 맛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형체가 사라진 무와 물고기를 같이 먹었다. 마치 진한 갈색 수프 같았다. 한 솥단지 지져서 여러 끼니를 먹고 또 먹었다. 그래도 질리지 않았다. 이 맛있는 물천어탕을 먹어 본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가을바람 찬바람이 일 때」중에서

누구나, 무엇이나 저마다 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모두 이름이 있거늘, 하물며 너른 들판에 이름이 없겠는가. 이곳 호동마을 들녘에도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이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오르내린다. 시골 생활에 점점 젖어가면서 어릴 적 듣고는 까맣게 잊어버린 들판 이름이 다시금 새롭게 들린다. 이른 아침, 운동 겸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 온 들판을 한 바퀴 돌고 온 성수 씨는, 굽은 허리 때문에 멀리 가지 못하는 길심 씨를 위해 들판 상황을 소상히 보고한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온 들판 이름이 다 나온다.

“등가래 우리 논에 나락이 점점 더 쓰러지고 있데.”
“범굴샘 ○○네 논은 나락이 깨끗하게 잘 되얏드만.”
“나들이, 삿갓등, 갓골, 어리등을 지나 무내미 우리 논까
지 빼앵 돌아왔구만.”
“무내미 우리 논은 오늘 나락을 빌라는가, 갓을 다 둘러놨등만.”
(...) 하루가 다르게 들녘의 색깔이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농로 한쪽에 무리지어 서 있는 키 큰 억새는 새초롬한 옛날 새색시처럼 몸을 꼬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성수 씨가 벌써 눈독을 들이고 있다. 베어다가 빗자루를 만들 모양이다. 모쪼록 들판도 제 이름을 잘 간직하고 많이 많이 불렸으면 좋겠다.
---「다 이름이 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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