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코시 부근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 동트기 전 지평선처럼 부옇고 흐리다. 심지어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걸어대는 와중이다. 백화점 앞 해사한 풍경은 차라리 비현실이다. 사대문 밖은 배밭이나 파밭, 마늘밭이 줄지어 있다. 그 옆에 늘어선 동그란 초가가 달마중 나온 소녀의 볼처럼 부드럽다. 무채색으로 가라앉은 땅바닥에서 눈길을 옮기면 형형색색으로 물든 사람들로 빽빽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나는 차마 그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따뜻한 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양지바른 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산수유는 잎보다 앞서 외로이 자기 색을 낸다. 방긋하게 웃는 선명한 개나리가 스멀스멀 꽃망울을 터트리면 산수유는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개나리가 피기 전, 서늘하고 짧은 봄날이 좋다. 내 사랑도, 내 삶도 따뜻한 개나리보다는 흐릿한 산수유를 닮았다.
--- p.14~15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이 시대에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 글만 써도 되는가?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무람없이 산문을 쓰고 시를 쓰고 영어를 가르쳤다. 내가 글을 짓는 행위는 나를 짓는 일이다. 글을 쓰며 나는 나를 찾고 싶었다.
--- p.16
새벽녘에 겨우 잠들었다 깨면 다시 글을 썼다. 내 글은 빈 종이와 같았다. 쓰였지만 쓰이지 않았어야 할 관념의 산물이자 쓰일 필요 없는 무가치 그 자체였다. 그 관념 안에 식민지 조선의 여성이 갖는 정체성을 숨기고 신여성으로 당당히 나아가고자 하는 모순을 품었고, 내가 발 내디디고 서 있는 땅의 피눈물과 외면을 담았다. 나는 아직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내가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은 앞으로 내가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는 미래와 맞닿아 있었다. 앞날이 없으므로 나는 현재만 살아갔다.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쓰자.
--- p.17
학교에서 하숙방을 오가는 길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만나면 속없이 산뜻해지는 마음이 들다가 집에 들어서면 잿빛이 되었다.
--- p.54
내가 써야 한다. 나도 쓸 수 있다. 제대로 당당하게 쓰고 싶었다. 시를 쓰고 버리고 지우는 까닭은 내가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할 용기가 필요한 이유였다.
--- p.58
당신은 당신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맞소. 당신 글은 조선다워. 조선인이라면 조선의 문화를 지켜야지. 당신은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르는 그 느낌,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냄새를 글에 담았단 말이오. 글이 맛있단 말이지. 나는 나대로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고 당신은 계속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오.
--- p.63
여전한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 p.102
우리는 시대에 맞서지 못했어. 그게 새삼 부끄럽구나. 이렇게 살아남아 그 시대의 나를 돌아보는 아픔을 말이야. 너를 모욕하는 것은 결국 내 위치에 대한 불안이 있었던 거야.
(…)
희진은 여전한 게 아니라 성장했다. 더 이상 집안을 잘 타고나 시대를 거슬렀던 여인이 아니었다. 떨치고 살아가는 자는 이렇게 떳떳하다. 나는 희진이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땅밑으로 쪼그라드는 나 자신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 p.105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더구나. 나도 하고 싶은 것이 있고, 잘하는 것이 있더구나.
--- p.106
섬 안에 갇힌 날개 잃은 갈매기로 살다 희진이 다가오면 부푼 파도처럼 반가웠다. 희진의 파도는 부서지지 않고 다가오는 물결이었다.
--- p.109
그럼에도 나는 서서 버틴다. 피하지 않는다.
(…)
좁은 하숙방에 웅크려 조용히 잦아드는 삶을 살아본다. 얼굴에는 미소가 달뜬다. 창작하는 자만이 누리는 희열이다. 그렇게 꿈을 꾼다. 꿈을 꾸면서도 그것이 꿈인 것을 안다. 깨기 싫어 불안하다. 넘실거리는 슬픔이 동해 바다를 건너 넘치듯 밀려온다. 나는 수장 직전에 깨어난다.
--- p.110~111
세상에 완전한 거짓은 없다. 어떤 사실은 약간은 진실이고 대부분 거짓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 p.113
난… 쉽게 지워지는 사람이고 싶었다. 만나고 난 후에도 잔상이 남지 않는 사람,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사람,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기억에 남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난 그 누구보다 복잡하고 왜곡된 채로 아련하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었다.
--- p.132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무엇을 믿느냐가 진실이었다.
--- p.133
웃고 싶지 않아도 웃는 얼굴이 나에게 가장 어울렸다. 그런 삶을 지우고 다음 세상이 있다면, 나는 진짜 정명혜로 살아가고 싶다. 이 마음은 그저 내게 하는 말이다.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 p.135
카페인과 차가운 공기를 입으니 잠이 깨는 것 같았다. 좋은 꿈을 꾼 것 같이 개운했다.
--- p.143
집은 언제나 포근했다. 코끝이 얼 듯 차가운 날씨에도 집 안으로 들어서면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 p.145
“인생,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거 하나도 없어. 바다만 그런 게 아니라 산도 그렇고 사람 마음도 그렇고 다 그래. 넌 가볍게 살아라. 가볍게.” 아버지가 해준 유일한 충고였다.
--- p.149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산 여섯 봉우리가 둘러싼 분지 안에 동화는 자리했다. 서울에서 동화에 들어가려면 길고 긴 터널을 여러 개 거쳐야 했다.
(…)
동화에 들어서면 난데없는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동화 특유의 냄새였다. 내륙지방인 동화에서 생선 냄새가 진동하는 이유는 고등어 때문이다. 동화시외버스터미널 앞에는 고등어조림이나 구이집이 즐비했다.
--- p.231~232
공무원들은 자리에 미리 준비해둔 계획서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식은 국수처럼 훌훌 넘겼다. 문화예술과 과장, 여성가족과 과장, 관광과 과장이 각각 ‘동화시’를 강조할 것인지, ‘민족’을 강조할지, 요즘 분위기에 맞게 ‘여성 작가’를 내세울지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 와중에 문화예술과 과장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 사업 주관 부서가 어디죠?”
--- p.235
정명혜 문학관이 여성을 중심으로 하든, 독립운동을 테마로 하든, 동화시를 강조하든 간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예산이었다. 예산이 없으면 삽 한 자루도 살 수 없다. 모두가 비용과 고장 처리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가성비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학관 예산 사용 기준이었다.
--- p.238
생각해보면, 유림도 지도교수를 진심으로 존경한다거나 학문적 성과를 높이 친다거나 해서 따랐던 건 아니었다. 그 마음 없는 예의에 대한 죄책감을 이번에 노교수와 함께 털어내고 있다. 여기서 덜어내면 저기서 채워졌다.
--- p.250
명분처럼 쓸모없는 건 없죠. 그냥 알아내면 되는 거야.
--- p.291
해진은 빛이 나지 않아도, 가치가 없어도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결정했다.
--- p.297
진짜 편지가 모형보다 가짜같이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정명혜 문학관의 상징이었다.
--- p.300~301
그걸로 됐다. 과거의 얼굴을 하고 오늘을 살아가더라도 됐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제 생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걸로 됐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말이다.
--- p.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