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과 자아실현은 모순 개념이 아니다. 참된 자아실현은 주님의 구속 안에서 참된 자유를 선사하는 자기완성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통해 당신의 삶을 완성하시고 자기완성에 이르셨던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아버지의 뜻이 있으며, 이 뜻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지체로서의 우리가 하나 되는 데 전혀 걸림이 없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일치와 통합보다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와 보편성의 실현이야말로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되는 일에 주저하지 말자. 자신만의 영성을 찾으려고 헛되이 방황하지 말자.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만의 독창성과 자신만의 인성을 찾고 발견하려고 노력하자. 만약 우리가 자신만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영성은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물안개처럼 우리 삶을 채울 것이다. 우리 각자의 독창성과 개개인의 인성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나를 알아보시는 표지일지도 모른다.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독창성과 한 인간 예수의 인성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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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격과 성격의 형성에는 마르타의 사랑보다 마리아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에도 마리아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 아니 모든 사람들 사이에 마르타의 사랑보다 마리아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 살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깨닫는다. 그런데 참으로 어렵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막상 그것을 해보려고 하면 도통 감을 잡지 못한다. 어쩌면 받아보지 못한 사랑이기 때문일까?
교회는 마리아의 사랑법이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많은 내담자들이 삶의 에너지를 되찾게 되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가치 있고 존중해주는 사랑을 그들이 느끼기 시작할 때이다.
옆에 있는 친구를 발로 차며 잔뜩 화가 난 아이에게 ‘넌 도대체 왜 그러니?’라고 묻지 않고 ‘무슨 일로 그렇게 화가 난 거니?’라고 물을 때, 우리는 그 아이의 마음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된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다는 느낌, 누군가가 내 마음에 관심을 보일 때의 느낌, 누군가 나에게 깊숙이 다가오는 느낌, 그 어떤 것으로도 내 존재를 평하거나 판단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나에 대한 존중감’, 이것은 전혀 다른 사랑이다.
마음의 상처로 삶의 의욕을 상실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동기와 의욕을 가지고 부활할 수 있었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었다. 많은 내담자들이 울면서 호소했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었다. 아무리 크고 깊은 상처를 오래도록 받아온 사람이라도 이런 사랑을 느끼는 순간 자신을 위한 삶을 다시금 시작할 의지를 갖게 된다. 빵보다 말씀은 강력했다. 빵이 마르타의 사랑법이라면, 말씀은 오늘 복음의 마리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법이다. 존재에 관심을 갖자 그들은 한결같이 되살아났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마르타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한 사람이다. 오늘 마르타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았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 이하) ‘그리고 이제 그것은 너의 것이다.’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초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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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이 뛰어난 것은 인간으로서 자신 내면의 방어적 본성까지도 통제할만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신앙에 따라 행동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의지대로 죽음 앞에서도 방어하지 않은 순교자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지혜 3,4) 순교자들의 행위야말로, 그들의 삶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지혜 3,6)에 합당하다 하겠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8,34)라고 말하며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라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 사람들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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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내적 불안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특별히 ‘거만한 자이거나 악을 저지르는 자’(말라 3,19)여서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2데살 3,11)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 안에 무엇이 나를 움직이며 조종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내 안에 어떤 불안이 나에게 이런 선택과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지 깨어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거만한 자’의 나락으로, ‘악을 저지르는 자’의 나락으로 떨어져 ‘검불’이 되어 사라지는 존재가 될 것이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이만하면 됐다!’라고 안심하지 마라. 그 누구도 너에게 하늘나라를 장담하지 못한다. 허세를 부리며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었으니 ‘이만하면 됐다!’라고 안심하지 마라. 누구의 칭송이 너에게 생명을 갖다 주랴? 행여 죄를 지을세라 전전긍긍하며 가슴을 치느라 정작 할 일은 하지도 않으면서 죄를 짓느니, ‘이만하면 됐다!’라고 안심하지 마라. 죄 없음이 너를 구원할 수 있으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그 존재 자체로 관계적인데 그래서 인간도 서로 사랑하며 관심을 가지라 하셨는데, 사람들과의 관계 자체가 부담스럽고 만남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어찌해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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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빠가 좋은 아빠이고 싶다. 대부분 엄마가 좋은 양육자이고 싶다. 그러려면 온전히 기능하는 자아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세상살이는 우리의 부모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교회의 사목자는 이 점을 잘 살피고 있어야 한다.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세상의 부모들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그들의 어려움과 힘든 것에 공감적 감수성도 갖추지 못한 채 열심히 설교만 하는 모양새는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세상에 나쁜 부모는 없다. 자신의 좋은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을 뿐, 좋은 부모가 되지 못했을 뿐, 부모는 부모다.
갈수록 많은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많은 젊은이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꺼린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심리적 어려움과 부적응을 초래하여, 가정에서 사회에서 갖가지 병리적 반응으로 나타난다. 젊은이들의 부적응은 우리 사회의 미래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온다. 사랑할 줄 모르는 젊은이, 사랑받을 줄 모르는 젊은이가 어떻게 서로 사랑으로 만나 가정을 꾸리고, 하느님의 선하심 속에 창조의 문을 열 수 있을까? 그리고 거기에서 태어나 ‘한 처음’을 시작하는 수많은 아이의 삶은 어떻게 될까? 저출산의 문제며 이미 고질화 되어버린 왕따, 학교폭력 그리고 어린 학생들의 자살 등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지적해주는 사건은 널리고 널려있다. 성가정, 어떻게 접근할까? 신자들에게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요 우리 교회 공동체의 문제로서의 인식과 자각이 필요하다. 공허한 신앙, 기도, 영성의 강조가 아닌 살아있는 건강한 신앙, 건전한 기도, 생활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교회에 이러한 신앙과 기도, 영성이 없다면 이 세상에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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