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 사람들은 동물도 사람과 아주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1475년에는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들이 아기를 죽였다는 혐의로 재판받는 일도 있었는데, 새끼 돼지들은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어미 돼지는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결국 가여운 새끼 돼지들만 남겨졌다. 비슷한 다른 재판에서는 기소된 동물을 변호하고자 변호사를 고용하는 일도 있었다. 중세가 저물고 현대 과학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기억, 생각, 의식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확인할 수 없는 것이었고, 과학적인 기준으로는 사람 이외의 생명체가 보이지 않는 무형의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예전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고, ‘의인화’라는 단어는 비과학적인 헛소리나 감성적인 몰이해를 뜻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 pp.9~10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 과학자들만 아는 내용이고 당신은 과학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생명체를 연구하고 설명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과학자의 전유물은 아니다. 지난 30억 년 동안 지구상에 출현한 생명체는 우리 모두의 것이고, 그들 중에 우리의 조상이 있고 그 조상들의 친척들이 있다. 우수한 사람은 장차 과학자가 되지만, 결국 우리는 전체 중에서 일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일상적인 어휘를 사용하려고 한다.
나는 표범에 관한 논문을 쓴 과학자가 느낀 두려움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으므로, 생명체를 ‘그것it’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생명체에 성이 있다면 대명사는 ‘그he’, ‘그녀she’ 또는 ‘누가who’라고 할 것이며, ‘그것it’ 또는 ‘어느 것which’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의인화를 할 것이다. 때로는 자연계나 진화 과정을 ‘가이아Gaia’라고 부를 것이다. 아니면 식물이 뭔가를 ‘기억한다’든가 무엇과 ‘소통’한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식물은 기억하고 소통하는 방식이 우리와는 다르지만 그 결과와 이유는 같기 때문이다. 지식은 본능과 다르고 욕구는 필요와 다르다. 그래서 식물이나 동물이 ‘알고 있다’ 또는 ‘원한다’고 말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 pp.13~14
그러나 그들은 지금 여기 있다. 바로 우리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리처드 도킨스의 유명한 이미지를 생각해야 한다. “당신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 옆에 서 있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고, 또 그 어머니의 손을 잡고 등등, 잡고 있는 손이 침팬지의 손이 될 때까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도킨스는 여기서 멈추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엄마의 손을 잡고 융합된 아치를 가지고 있고 파충류처럼 보이지만 이빨은 다른 초기 단궁류가 될 때까지 더 멀리 갈 수 있다. 단궁류는 손이 없다. 우리는 그녀의 앞발 중 하나를 잡을 것이다.
--- pp.155~156
흥미롭게도 다른 유인원 계보의 화석은 다소 변했지만 우리만큼 변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일인 듯하다. 우리 조상들은 왜 땅에서 살기 위해 평생 동안 스스로 변화를 꾀했을까? 털이 없는 피부는 모기와 햇볕에 노출되고, 두 다리로는 네 다리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없으므로 포식자에게 자신을 노출시킬 수 있다.
여러 이론이 있지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른다. 예를 들어, 빙하시대에는 세계의 많은 물이 얼음이 되었고 비가 부족했으며 나무는 말라죽었다. 나무 사이에 공간이 엄청 커져서 우리는 나무 사이를 이동하지 못하고 땅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개코원숭이들도 우리처럼 나무를 떠나 사바나를 향해 갔다. 그것이 이유라면, 기후변화가 그들에게도 적용되었지만 그들은 털과 체형을 유지했다.
--- pp.230~231
산족은 자연세계에 사는 다른 모든 생명 형태와 같은 종류의 삶을 살았으며 우리와 가축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서로 다른 종은 욕구도 문제해결 방식도 다르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산족은 이것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도 같은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다른 종을, 지식은 가지고 태어났지만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우리 조상이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른 모든 종이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한, 다른 종도 관찰하고 배운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모사와 물방울, 또는 ‘흰쥐’ 짚신벌레와 위험한 빛의 사례를 잊지 말고, 환경 이해의 중요성과 생존에 기여하는 생활양식을 생각해 내는 것을, 우리와 같은 부류의 ‘접촉하지 않은 산족’으로부터 배우자.
--- pp.274~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