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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시작되지 않은 오래된 이야기

시인동네 시인선-214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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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9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78g | 125*204*20mm
ISBN13 9791158966133
ISBN10 11589661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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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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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들어올 때는
밖에 당신을 걸어두고 오시오
문 앞 못에다 겉옷을, 이름을, 목소리를
냄새까지도 박아두고 들어오시오

여기에는
당신이 모르는 당신이 있소
당신이 알아야 할 당신이 있소
당신만 아는 당신이 있소
그저 당신이 있을 뿐이오

아직 입구는커녕 문 앞에 박힌 못조차 찾지 못한 당신들
지금 여기에 살면서 여기를 찾아 헤맨다
온갖 냄새를 뒤집어쓴 채
컹컹 짖어대던 우리들은 이름을 몰라
내 이름을 몰라
계속 짖어대고
겉옷을 벗기 위해
서로의 살갗을 하염없이 할퀴면서
그저 우우 울기만 할 뿐

여기는 어디오
여기는 어디 있소
---「어떤 안내문」중에서

당신이 꼭 당신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당신은
낙타의 모래 낀 속눈썹이어도 되고
쉴 새 없이 비벼대는 파리 앞다리여도 되고
종일 우물거리는 소 입이어도 된다

방파제 위 낚시꾼 휘감아 나가는 너울이라도 상관없고
암컷 등에 올라탈 때 제 뒷다리만 해지는 코끼리 성기라도 상관없다
공원 한구석에서 꾸덕꾸덕 말라가는 똥이라면 더 좋다
당신이 원한다면 지난봄 라일락 향기도 될 수 있고
원하기만 한다면 잠든 아기의 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명심할 것

당신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동시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

내 안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다 담아낼 수 있는 내가 없듯이
---「어디에도 없는 그릇」중에서

태어났을 때 난 이미 낡아 있었지
누군가 쓰다 버린 팔다리를 주워다
정성스레 꿰맨 자국이 있고
해변에 뒹굴던 머리통을 주워다 얹었는지
수시로 머리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지

엄마라고 처음 내뱉은 순간 입에선 나방이 쏟아졌지
껍데기를 둘둘 감고 있던 번데기는 그새 부화했고
겨우 찾은 내 목소리에선
노인의 쉰 소리가 섞여 있었지

북극성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내 눈은 이미 북극성을 알고 있었지
원래 누구의 눈이었을까

이상할 만큼 가늘고 옅은 손금
수레바퀴가 한 바퀴, 두 바퀴 구르는 걸 세다가
숫자들이 사라지고 바퀴가 구른다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때
손금도 조금씩 사라졌지

거울 볼 때마다
한 번도 나를 알아볼 수 없지
당신, 아니 나는 누구세요?
---「거기, 누구세요?」중에서

마음의 준비란
상조회사 약관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고
장례식장을 대실로 할 건지 특실로 할 건지나 정하는 것
아니면
부고를 누구한테까지 알릴 건지 고민하는 것
그것도 아니면
산소호흡기 꽂고 점점 가라앉는 환자를 보며
입원비가 얼마였던가 잠깐 생각하는 것
아니지 아니지 이건 아니지
머리를 세차게 흔드는 순간
다음 학기 등록금은 어쩌지, 라는 생각이 불쑥 드는 것

시간은 얼마 안 남았는데
환자는 점점 서늘하게 굳어 가는데
정작 환자의 생애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는 것

마음의 준비란 그런 것이다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중에서

이것은 오래전부터 누군가 했던 이야기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이야기

드디어 고목에 꽃이 핀다고 했지 꽃은 아직 고목을 찾지 못했고 그렇다면 내가 피는 걸로 할까 먼저 천 년을 기다려 고목부터 만들어야겠지 그런 뒤 가지 끝에 오래 품고 있던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 힘 다해 한 송이 한 송이 나를 피워 올려야지 그때 천 년을 숨죽이며 살던 바람이 시커먼 입김을 불지도 몰라 오래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뱉어낼지도 몰라 이제 막 퍼져나가려던 내 향기를 악취로 바꿔 버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나는 바람이 되어야 할까 또다시 천 년을 기다려 고목부터 만들어야겠지 그러고 나서 순한 바람이 검은 입김 토해낼 때까지 땅바닥을 수만 번 뒹굴도록 해야겠지 지칠 대로 지친 바람이 이제 막 벙그는 꽃잎을 말려 버릴 때 그 순간 나비 한 마리 날아와 계속 맴돌지도 몰라 이미 천 년 전에 말라 죽은 고목은 흔적조차 없는데 나비는 바람에 휘감겨 계속 떠밀려 갈지도 몰라 영원히 마르지 않을 젖은 날개 하염없이 퍼덕일지도 모르지

이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는 이야기
여기서 끝난다고 해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
---「아직 시작되지 않은 오래된 이야기」중에서

기도하는 두 손이 너무 공손해 기분을 해친다

우리는 더 많은 손이 필요해
트리에 장갑을 주렁주렁 걸어놓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소원을 꾹꾹 눌러써도
뒷장에는 새겨지지 않는 글자들

여기에선 다들 속삭인다
무언가 곧 시작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맨발로는 걸을 수 없는 곳에서
무릎을 꿇는 사람들

저는 무엇의 일부입니까?
어떤 것을 그리고 있나요?

뜯지 않은 편지를 돌려받는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차고 거대한 손이 트리를 거꾸로 세운다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다른 손이 필요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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