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언제나 바흐가 해방감을 준다고 느꼈어. 그의 엄격함이란 건 곳곳에서 착시로 밝혀져. 바흐는 지시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템포 지시는 거의 없고, 다이내믹 관련 명령도, 프레이징도 아티큘레이션도 없어―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아주 흥미로워. 바흐 안에서 그리고 바흐를 통하여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거든! 내 스승 조지 말콤은 이 자유에 날개를 달아주었지. 과장해서 말해본다면 이래. 바흐의 푸가는 열 가지 다양한 템포로 연주할 수 있고 그 결과물은 대부분 감명 깊어.
--- p.33
첫 음이 울리기도 전에 이미 난 연주회를 하고 있는 거야. 음악은 고요로부터, 평온으로부터 나와야 해. 물론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나 〈평균율 클라비어〉를 잘 연주하고자 한다면 거기에다 구체적, 물리적 현장감도 필요하고. 소년 시절엔 그런 게 뭔지 거의 몰랐어. 그렇지만 내가 몰입하고 집중하는 능력이 있다는 건 그때도 이미 알았네. 참고로, 그건 훈련할 수 있는 거야. 괴테는 베토벤을 올차고 결연하고 다부진 인물로 묘사했지. 연습도 그거랑 똑같아. 여덟 시간이어야 하는 게 아냐. 나는 피로를 느낀다 싶으면 연습을 중단해.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아. 차라리 에스프레소를 한 잔 하거나 좋은 책을 몇 쪽 읽지.
--- p.39
재능 있는 젊은이들, 그들이 무엇에 몰두하는지,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좋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이런 게 내 관심사야. 그리고 그저 ‘커리어 병’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힌 게 아니라 내면의 욕구에서 우러나 음악을 하려 하는, 심지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음악가들을 거듭해서 발견하곤 해. 가끔은 전문 연주자가 되려는 건 아닌 청소년들을 가르치기도 해. 이런 경우에는 올바로 듣게끔 교육하는 방향, 이해하며 듣게끔 교육하는 방향, 좋은 취향을 형성하게끔 교육하는 방향으로도 진행하지. 반면 오늘날 많은 콘서바토리에서는 그저 프로 양성을 위한 혹독한 훈련이 행해질 뿐이야.
--- p.72
모든 자유로운 인간은 하나의 정치적 운동의 시종 또는 동조자 또는 반대자 중에 무엇이 될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예술가들은 세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위에 언급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에서는 활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뜨거운 아스팔트는 피하는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은 반항적이며, 어려운 시기일수록 투쟁하고 항의하면서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세 번째 방식의 대변자들은―유감스럽게도 수적으로 우세다―예술과 정치는 서로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영원한 구경꾼 및 외면자의 태도다. 투사들과 반항하는 이들의 무리를 보면, 이런 운동은 대개 연극계와 문학계에서 생겨남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클래식 음악계는―이것은 우울한 일이다―완전한 침묵이 지배한다. 특히 음악의 고장 오스트리아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작가와 배우는 그들의 음악계 동료보다 더 많은 시민적 용기와 정의감각을 가지고 있는가? 내 개인적 선택은 내려졌다. 나는 무대를 멀리하겠다. 이것은 힘든 결정이다. 왜냐하면 나는―의도치 않았지만―연주회 청중을 벌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행동을, 그리고 이와 결부된 메시지를 이해해주길 희망한다. 그리고 평소처럼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시점이 곧 오기를 희망한다.
--- p.235, 「누가 외르크 하이더를 두려워하랴?」중에서
바흐의 정신을 가급적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손으로 직접 쓴 악보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최고의 인쇄 버전이라도 그의 필체가 지닌 아름다움과 우아함과 힘과 에너지는 결코 모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굽이치는 이 경이로운 필체의 형상은 그야말로 암시적 위력을 발산하며 이 음악이 관통해 흐르는 길을 가리켜준다. 이 대양더러 높은 파도를 일으키지 말라고 금지할 순 없다! 자필원고는 게다가 우리가 다양한 음자리표로 악보를 읽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반면 현대의 판본은 잘된 것이라 해도 음표만 전달할 뿐이다. 자필악보를 해독하는 것이 너무 수고스럽거나 그럴 엄두를 낼 수 없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필본이나 자필 편지를 보는 데서 오는 기쁨을 느껴보려는 시도라도 최소한 해야 하리라.
--- p.245, 「현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바흐」중에서
해석자와 그들의 해석을 평가한다는 것이 그 정도로 애매모호하고 주관적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콩쿠르를 개최하는가? 콩쿠르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가? 이는 정당한 질문이며, 용감한 “아니오.”로 대답될 수 있다. 음악에는, 아니 예술에는 적수라는 게 없다. 음악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에 ‘맞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연주회는 청중을 위한 행사다. 청중을 위해서 음악 작품이 연주된다. 피아노 리사이틀의 해석자는 주최측과의 협의하에 들려줄 작품들을 선택한다. 자신이 뭘 무대에서 연주하고 싶은지는 아마도 해석자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콩쿠르의 프로그램은 대체로 음악사 레퍼토리 전체를 두서없이 종횡무진한다. 참가자는 독주로, 실내악 연주로,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든 가능한 장르와 양식 면에서 자신을 선보여야만 한다. 이는 콘셉트를 이루는 아이디어로서는 멋지고 좋지만 결코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다.
--- p.419~420, 「음악 콩쿠르-예술인가 스포츠인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