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애초 바다에서 태어났다. 뭇 생명의 발원지가 바다이듯, 길도 오래전 바다에서 올라왔다. 믿기지 않는가. 지금 당장 그대가 서 있는 길을 따라 끝까지 가보라. 한끝이 바다에 닿아있을 것이다. 바다는 미분화된 원형질, 신화가 꿈틀대는 생명의 카오스다. 그 꿈틀거림 속에 길이 되지 못한 뱀들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처럼 왁자하게 우글대고 있다. 바다가 쉬지 않고 요동치는 것은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로운 흙내에 투명한 실뱀 같은 길의 유충들이 발버둥을 치고 있어서이다. 수천 겹 물의 허물을 벗고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 근질거리는 살갗을 비비적거리고 있어서이다.
--- p.12
누가 새들을 자유롭다 하는가. 하늘에는 새들이 걸터앉을 데가 없다. 목축일 샘 하나, 지친 죽지 하나 부려 둘 걸쇠가 없다. 새들에게 하늘은 놀이터가 아니다. 일터다. 망망한 일터를 헤매어 제 목숨뿐 아니라 주둥이 노란 새끼들의 목숨까지 건사해야 하는 새들은 녹두알 같은 눈알을 전조등 삼아 잿빛 건물 사이를 위태롭게 날며 기적처럼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마른 씨앗 한 알, 버러지 한 마리 놓치지 않고 적시에 부리를 내리꽂아야 한다.
--- p.29
낙타가 그 많은 동물들 중에 오직 인간만을 태워주기로 한 것은 자기보다 불쌍한 짐승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사나운 뿔도 날카로운 이빨도 없이, 힘센 앞발도 탐스러운 갈기도 없이, 약은 잔꾀 하나로 왕 노릇 하다가 욕망의 늪에 빠져 죽고 마는, 천하에 어리석고 미련스러운 천둥벌거숭이들을 묵언 설법으로 제도하기 위해 겸허하게 무릎을 꿇고 잔등을 내밀어주는 것이다. 낙타에게도 인간에게도 삶이란 견디는 것, 갈증도 그리움도 시간의 상처도 삭히고 삼키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타자의 죄를 지고 가는 늙은 성자처럼 저보다 더 고단한 중생 하나 잔등 위에 앉히고 낙타는 초연하게 걸어 들어간다. 아득한 비현실의 현실 속으로.
--- p.41
오늘날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는 주적은 맹수나 UFO, 궤도에서 떨어져 나온 소행성들이 아니다. 인간의 시력 한계를 벗어남으로써 물리적인 위협을 덜 받게 된 존재들, 해충이나 박테리아, 바이러스 같은 미물들이 인류에겐 훨씬 더 치명적이다. 위장 에너지로 연명해야 하는 생명체들은 좋든 싫든 다른 생명을 축내거나 해코지하며 살아야 한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구조 안에서 대부분의 동물들은 잡아먹혀 죽는다. 천신만고 끝에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위포식자로 군림하게 된 인간만이 비교적 제 수명을 누리다 간다. 자기보다 힘센 동물들은 희귀 동물로 만들어 모조리 우리 안에 가두어 버리거나 영역 밖으로 추방해 버린 결과다. 지구 역사상 먹이사슬의 최상류 포식자는 반드시 멸종하였다는데 언젠가 인류가 멸종하게 된다면 이런 미시적 존재들에 의해서 아닐까. 모기에 대한 내 분노의 밑바닥에는 약육강식의 순차적 구조가 아닌 강육약식의 반역적 도발에 대한 영장류의 자존감과 위기의식이 작동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 p.52
단단한 외피를 두르고 오만한 적요 속에 기의를 가두고 있는 수상한 기표들, 이런저런 일들로 눈코 뜰 새 없는 와중에 그림자만으로 꽃의 빛깔을 짐작해보라고 채근하는 시들을 왜 나는 이리 오래 붙들고 있는 것일까.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 시라 했던 야콥슨의 말대로, 입속의 말들을 전복하고 유린하는 의도된 불친절이 그래도 견딜 만했던 것은 삶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들만이 틀어낼 수 있는 문장의 밀도와 깊이 때문일 것이다. 모호하고 때로 난삽하기까지 한 시편들과 동화하는 일은 자음만으로 기록된 옛 히브리 문서들을 해독해내는 일만큼 난해하기도 했지만 내가 왜 시를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가를 준열하게 상기시켜 주기도 했다. 하여, 문외의 독자로서, 만나본 적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는, 그 또한 나처럼 변방의 글쟁이일지 모르는 한 시인의 시집에 대한 헌사를 이렇게 쓴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쁜 남자의 향기’ 같은 시를 접할 수 있었노라고. 위무와 교감을 섬기는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할지라도 끝끝내 매혹이어야 할 시의 한 당위(當爲)를 오래오래 지켜주시라고.
--- p.78
언제부터인가 내 안의 얼음벽이 시나브로 녹아내리고 있음을 느낀다. 자체 중력이 약해져 내부 균열이 일어났거나 외부의 어떤 기운으로 하여 한 귀퉁이가 와해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반감기가 지난 방사성 물질처럼 몸피가 점점 줄어들다가 가뭇없이 소멸해 버릴 것도 같지만 껍데기만 남은 쭈그렁이별이 되어도 그다지 쓸쓸하진 않을 것 같다. 내 안에는 내가 없고, 사는 일에는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지나온 시간이 가르쳐주었으니까. 시력이 약해지고 관절이 삐걱대고 기억력과 감수성이 예전 같진 않아도 지금이 인생에서 제일 젊다는 엉뚱한 착각이 다녀가기도 하니까. 사는 일이 존재와 존재의 맞물림 같은 관계의 역학이고 사이(間)의 일이라면 ‘나’란 어쩌면 타자와 타자 사이 교집합 안에서 한 점 좌표로 흐느적거리는 동사(動詞)일 뿐, 명징한 명사(名詞)는 아닐지도 모른다. 봄물처럼 녹아 흐르고 범종 소리처럼 퍼져나가며 들숨 날숨으로 스미고 물들다 지수화풍으로 흩어져가는, 그런 게 목숨의 문법일 터이므로.
--- p.91
골목의 시간은 느리다. 한 잔 술에 거나해진 남자가 외눈박이 가로등 아래를 갈지자로 흥청이며 〈사랑만은 않겠어요 〉를 흥얼거려보는 곳도, 산전수전 다 겪은 안노인들이 구부정한 어깨로 쭈그려 앉아 누추한 일상을 궁시렁거려 보는 곳도 시간이 멈추어 버린 골목에서일 것이다. 골목에서는 바람도 속도를 늦추고 모퉁이에 쌓인 눈 더미마저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천천히 녹는다. 달각거리는 냄비 소리, 도란거리는 말소리, 선잠 깬 아기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진즉 생의 이면을 알아버린 사람들의 가슴조차 잔잔하게 흔들어 놓고, 밥 냄새, 찌개 냄새, 비 오는 날 호박전 부치는 냄새들이 가난했지만 가난을 몰랐던, 아늑하고 따스한 기억 속으로 우리를 가만히 데려다 놓는 것이다.
--- p.113
머리맡 충전기에 폰을 뉘어 놓고 나도 침상에 나란히 눕는다. 함께 누워 충전하는 사이이니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가. 몸을 바닥에 밀착시켜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 받아야 까무러쳤던 몸이 부활되는 폰처럼 매트리스에 밀착해 일용할 에너지를 보충받아야 하루어치의 삶을 가까스로 살아낸다. 해 뜨고 달 지듯 일어나고 눕기를 되풀이하는 우리, 아침에 빠져나갔다 저녁에 귀환하는 우리네 일상은 포물선을 그리든 공중곡예를 넘든 침대에서 침대까지의 단순 반복 아닌가. 침대가 슬어놓는 꿈과 꿈 사이를 비상과 추락으로 변주하면서 중력에 저항하여 수직으로 일어섰다 중력에 투항하여 수평으로 드러눕는, 뛰어봤자 벼룩일 뿐인 일생. 낮 동안 도모하는 온갖 동물적 활동 또한 질 좋은 잠과 안전한 휴식 같은 우리 안의 식물성을 충족하기 위한 방편일 따름 같기도 하다. 병원 침대에서 첫 숨을 쉬고 병원 침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생, 침대에서 침대까지 자전하듯 공전해가는 우리는 어느 항성 주위를 돌며 어디를 향해 가다 어디에 불시착할 소행성들일까.
--- p.134
골목 어귀, 잡풀 더미 사이에 겨우겨우 피어난 구절초 앞에 멈추어 서 있다. 섬과 섬의 뿌리가 대륙붕 아래로 잇닿아 있듯, 존재란 어쩌면 한 뿌리의 거대한 고독에서 싹이 터 제각각의 바람결에 흔들리다 사위는 천만 송이 외로움 같은 것 아닐까. 결국 지고 말 꽃이라 해도 목숨의 한때, 생명의 저 안으로부터 길어 올린 광채를 누군가 응시하고 주목해 준다는 것, 스러져갈 생명끼리 소통하고 교감하고 위무하고 찬탄하며 사는 일의 헛헛함을 다독거려본다는 것, 글쓰기도 내겐 그런 의미겠다. 대상이나 사물을 도구적 유용성의 층위로 지나치지 않고 질료적 본성을 들여다보며 교집합을 찾는 존재론적 성찰이 문학이라면 말이다.
--- p.159
구름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저 높이 어디쯤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계실 것 같다. 앙상한 등뼈로 벽을 향해 모로 누워 계시던 아버지, 닫힌 방문을 열고 침대 곁에 어색하게 걸터앉는 딸을 향해 가까스로 돌아누우신 아버지는 삭정이 같은 팔을 뻗어 우리 딸 고맙다고, 복 많이 받고 늘 좋은 날 되라고, 그렁그렁 축원을 하시곤 했다. 그런 아버지 마음이, 아직도 이 행성을 떠나지 못하고 저 높이 어디쯤에서 지켜주고 계실 것 같다. 그러니까 구름은 먼저 떠난 이들이 남은 자들에게 보내는 못다 한 말씀 같은 것, 눈물이거나 정한이거나 애틋함이나 간절함 같은 것, 떠나왔으나 떠나지 못한 마음들이 더 먼 하늘로, 아득한 별들로 올라붙지 못하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리움의 높이로 서성이고 있는 것 아닐까. 흐르다 머물다 엉겼다 풀어졌다 하며 나뭇가지와 대지에 격렬한 눈물로 쏟아져 내리고 남겨진 이의 귓불과 머리카락을 안개 바람으로 간질이기도 하면서 지상의 목숨들에게 젖을 물리듯 흩어졌다 머물다 하는 것 아닐까.
--- p.189
시간이 흐르는지 우리가 흐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디서건 같은 속도로 흐르지는 않는다. 어느 때는 기어가고 어느 때는 날아간다. 뭉텅뭉텅 떨어져 버리거나 자취 없이 증발해버리기도 한다. 아이의 유치원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인생의 격변기였을 내 젊은 날은 아무리 돌아봐도 별스럽게 기억에 남는 일이 없다. 어느 때보다 바쁘게 살아낸 듯싶은데 도둑맞은 것처럼 뭉텅이째 결락이다. 정신없이 떠내려가는 물살 속에서 역할과 노릇에만 집중하느라 일수 이자 갚듯 하루하루 허겁지겁 살아내서일 것이다. 시간의 중력은 의미의 중력이어서 정체성 없는 시간은 쉽게 휘발된다. 사건이 기억으로 상감(象嵌)되는 데에는 완만한 속도가, 머무름이 필요한데 지속성 없이 탈(脫)서사화한 시간은 밀착되지 않고 미끄러져버린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근거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존재라는 믿음일 것이어서 파편화된 순간들과 단편적인 스틸 컷은 고착되지 못하고 휘발되어버린다. 내 꿈, 내 의지, 내 이야기가 서사적 맥락으로 녹아든 멈춤의 시간이라야 향기로, 빛으로, 기억으로 남는다.
--- p.195
지나버린 시간, 기억의 편린들을 따뜻한 회상으로 길어 올리는지, 나무가 가만히 잔가지를 흔든다. 생명의 내홍을 환희로 치환해 꽃으로 내어 달 줄 아는 나무. 늙어도 늙지 않고 늙을수록 더 아름다운 나무. 이승의 삶을 다 살아내어도 끝내 적멸에 이를 수 없다면,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돌 수도 없고 바위처럼 무심해질 수도 없다면, 오래 늙은 배롱나무 아래 순한 흙거름으로 묻혀도 좋겠다. 절 마당 한 귀퉁이에 밝고 환한 빛으로 서서 갈길 묻는 나그네의 어둠을 가만히 밝혀주어도 좋고, 승자의 역사 속에 묻혀버린 패장의 무덤가를 지키며 안으로 안으로만 나이를 먹어도 괜찮겠다. 불 속에서조차 소멸되지 못할 내 안의 광기들은 캄캄한 물관을 거슬러 올라 삼복염천 석 달 열흘을 혼곤한 울음으로 타오를 것이다. 타버린 것들만이 다시 맨몸으로 설 수 있음을 알기에. 죽어 나무가 되고 싶은 건 끝끝내 아름답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끝끝내 살고 싶어서일까.
--- p.226
사랑이 삶을 관통하는가. 삶이 사랑을 포섭해 들이는가. 빠르게 붕괴하고 쉽게 상하는 게 사랑이지만 세상 모든 영화와 문학, 대중가요 속에 유효기간 없이 통용되어 온 테마가 사랑이고 보면 사랑과 사람(삶), love와 live가 음소 하나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이유가 자명해진다. 살아가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어서 사랑 없이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영화도 문학도 대중가요도 이루어진 사랑 아닌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살갗을 공유하고 체온을 확인하는, 찰나의 불꽃놀이를 상시화하는 일인가. 주민등록을 합치고 수저통을 합치고 합리적 인수합병(M & A)의 시너지를 창출해 종족 번성에 이바지하는, 그것이 이루어짐의 궁극인 건가.
--- p.260
불평불만도 공치사도 없이 밑바닥 팔자를 감수해 온 내 순한 발가락들을 가만가만 꼼지락거려보다가 요양병원 침대에 잠들어계실 노모의 앙상한 발을 소환한다. 고관절 와상으로 뻗정다리가 되는 바람에 강제 퇴출당한 엄마의 발은 다시는 온전히 닿을 수 없는 바닥에 발꿈치만 겨우 얹어두고서 슬프도록 멀쩡한 정신줄의 주인을 무심한 척 패대기쳐 두고 있다. 침상에 묶인 채 흙냄새를 그리워하는 노인병동의 핏기 잃은 발들, 알 것 같다. 긴긴 노정의 마지막 간이역 같은 침상 위의 빼곡한 발들이 저승길을 터덕거리고 있는 이유를. 불가촉천민처럼 몸의 가장 밑자리에서 일생을 살아냈어도 직립으로 곧추서 태양을 향해 맞장뜨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고 아쉬워 방향감각을 잃고 있는 것이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다른 층위의 차원에까지 인도해 들이는 책무마저 결국 발의 몫이라니. 뇌졸중 증상으로 뜨끔한 맛을 본 선배가 운동 삼아 강가를 걸을 때마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말을 기도처럼 읊조린다더니 살고 죽는 일도 알고 보면 머리나 가슴, 간이나 콩팥보다 발에게 빚지는 일이로구나.
--- p.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