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당파싸움이 지긋지긋한 지경이네. 내가 이 지경까지 만들었으니 내 손으로 청산하고 싶지만, 저들의 권세가 왕권마저도 쥐고 흔드는구먼. 심약한 내 탓도 있겠지…….」
「전하, 송구하옵니다. 그런 말씀 마소서. 소인이 하겠나이다. 감히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간악한 무리들을 제 손으로 처단하겠나이다.」
「든든하이. 호찬이 그리 말해주니 든든해. 내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구만. 허허허…….」
웃고 있던 주상은 다시 조용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서 호찬이 나를 도와줬으면 한다네.」
「예, 전하! 명만 내리시옵소서.」
명만 내리면 되는 것을 도움이라 칭하기에, 순간 최호찬은 제 주군이 꺼낼 말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주군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최호찬이었다. 그것이 설사 짚을 들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라 할지라도.
「짐은 원자(元子) 단에게 세자 책봉을 할 것이야. 대비나 명빈…… 서인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되지만,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야. 짐은 단에게 기대를 걸겠네. 짐이 어느 정도는 반석을 깔아줘야 단이 해낼 수 있어. 단이 당파싸움을 정리하고 강력한 왕권을 이룰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네.」
「예, 전하. 소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허면…… 소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옵니까? 하명만 하시옵소서.」
「단에게 어떻게든 세자 자리를 줄 것이지만, 솔직히 내 주위에 믿을 만한 사람이 몇 안 된다네. 단이 세자가 되면 다음 보위를 이을 준비를 하여 시강원(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이나 익위사(조선시대 동궁(東宮)의 시위(侍衛)를 맡은 관청)를 설립할 것이 아닌가?」
「예. 그러하옵지요.」
「시강원이나 익위사를 그대 같은 사람으로 채우고 싶으이. 전혀 당파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말이네. 허나 자네는 내 곁에 있어야 하니 그럴 수는 없고……. 대신 자네의 여식을 나에게 주게.」
헉!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뜻인가? 아영을……? 여식을 달라는 주군의 말에 최호찬은 놀란 음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까지 더듬었다.
「전하, 그게 무슨……? 제 여식은 나이가 너무 어려 후궁으로 들일 수가 없나이다. 통촉하여주옵소서.」
최호찬은 또다시 편전(便殿)마루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리 주상 전하의 명이라지만 궁중 여인들의 치열한 암투 속에 어린 아영을 밀어 넣을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까마득했다.
「호찬, 무슨 소린가? 짐이 언제 후궁을 들이겠다고 했나? 지금 있는 후궁들만으로도 머리가 아프이.」
「예……? 그럼……?」
「세자의 호위무사 말일세. 익위사에 들이란 말일세.」
이건 또 무슨 말이신가? 계집아이를 어떻게 익위사에 들인단 말인가?
「하오나, 전하……. 여식이옵니다. 남아가 아니옵고, 계집이옵니다.」
「알고 있으이. 내가 자네의 여식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자네의 자식도 구분 못 할 만큼 어리석어 보이는가?」
「그게 아니옵고, 어찌 계집을 익위사로 들일 수 있겠나이까? 그러니…….」
당황해하는 최호찬의 말을 급하게 막으며 주상은 또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러니 내가 이리 주위까지 물리며 말하고 있질 않은가! 듣자 하니, 여식이긴 하나 무예가 출중하다 들었네.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웬만한 호위무사들보다도 더 대단하다 하니, 호찬 그대의 나이가 되면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가 될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러니 달라는 말이네. 그대가 어린 시절부터 나를 지켜준 것처럼, 그대의 여식이 이제 내 자식을 지켜달란 말일세. 그대의 여식이라면 성정 또한 옳고 강직할 것은 뻔한 일 아닌가? 그러니 내 청을 들어주게.」
「전하, 허나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하시옵니다.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만큼 무예가 출중한 것은 맞사오나, 반가의 여식이 어찌 하늘 곁에 머물겠나이까? 부디…….」
「그래서 자네에게 도와달라 하는 것이야. 내가 믿을 사람이 별로 없어. 그대이기에 이런 부탁도 하는 것이야. 짐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이야……. 익위사에 들이면 반가의 여식처럼 살 수도 없고, 혼인 또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나. 허나, 이리 부탁함세. 자네의 주군으로서 하는 부탁이 아니라 벗으로서 부탁하네. 그대가 나에게 한 것처럼 이 나라를 위해 세자를 지켜주게. 분명 단은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뤄낼 것이야.」
부탁이라니……. 하늘같은 주상 전하께서 한낱 신하에게 부탁이라니. 신하 된 도리로서 죽으라면 죽고, 처자식을 내놓으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아영이 남자였다면 이렇게 당혹스러울 일도 걱정할 일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다음 보위를 이어갈 세자 저하를 모신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쉽게 찾아오지 않는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가 없었다. 허나,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아영은!
「자네가 무얼 걱정하는지 잘 아네. 혹시나 이 일이 발각되면 자네 여식이나 가문이 왕가를 농락했다 하여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 내가 모르겠는가……. 허니, 이 일은 자네와 나만의 비밀로 하세. 내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고, 또한 나중을 위해 절대로 문제 삼지 말라는 문서까지 남길 것이야. 나중에 단이 커서 보위를 물려받을 때쯤 되면 내 입으로 단에게 일러둘 것이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말라.」
이런 연유로 아영은 무영이라는 이름으로 익위사의 관직을 얻게 되었다. 지금은 분별이 가지 않지만, 나중에 여인의 목소리가 나올 것을 대비해 처음부터 벙어리로 행세했고, 얼굴 또한 분장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무예를 연마하고 아비처럼 궁에서 전하를 모시며 살 수 있다는 말에, 아영은 마냥 좋아라만 했다.
며칠을 곡기도 끊어가며 누워 계시던 어머니의 걱정도 모른 채…….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