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있는 남자여도, 파멸이고 파괴여도, 준코에게 그 남자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짝이며 옆구리에 오싹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
혹시 이사무의 아이가 생기더라도 자신은 낳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임신은 단순한 ‘실수’일 뿐이다. 내 인생을 바쳐야 할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없는 것보다 나은 남자’에게 온몸을 던져 의지할 수는 없다. 쓰레기통 속의 둘둘 말린 열성의 잔해가 자기 자신인 것만 같아서 기요미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 p.40~41
준코와 함께 있으니 어디에도 모모코의 자리는 없는 것만 같았다. 다다미 바닥에 일어난 거스러미를 쳐다보고 있기도 거북살스럽고, 그렇다고 창문을 내다보면 바람에 흔들릴 일도 없는 팬티며 브래지어가 매달려 있다. 이런 게 준코의 행복이라면 자신은 바다 위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걸까. 준코의 양어깨에 길게 땋아 내린 머리에서 삐져나온 머리칼 끝만 바라보았다. 모모코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준코, 연하장에 행복하다고 써 보냈지? 나, 그 말 믿었어. 그래서 널 만나러 온 거야.”
준코의 미간이 좁혀졌다. 모모코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준코,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어?”
저런 속옷을 입고, 호적에도 올려주지 못하는 그런 남자의 아이를 낳고,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어…….
--- p.67~68
동봉한 사진에는 수줍음 타는 창백한 얼굴의 소년과 에이프런 차림의 준코가 찍혀 있었다. 등 뒤로 라면 가게 계산대가 보였다. 어깨를 맞댄 엄마와 아들의 모습이다. 미나에는 준코의 화장기 없는 얼굴과 길게 땋은 머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조리 실습 시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기미가 번진 뺨, 눈과 입에 퍼진 주름이 준코의 현재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피부 손질도 못 하고, 유행 따라 옷 한 벌 못 사는 십여 년이 모조리 그 사진에 찍혀 있었다. 이게 지금의 준코다.
한참 보고 있으려니 그 웃는 얼굴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온몸에서 스르륵 맥이 빠지는 것 같았다. 다니카와가 이 사진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허영기 가득한 미나에와 비교하면서 혹시 후회하지는 않을까.
-145~146쪽, 2000 미나에
--- p.145~146
딸이 이십여 년 동안 한 남자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싫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딸보다 모자란 것만 같은 기분이다.
“호적은 아직 안 넣었어?”
“응. 그것도 그냥 익숙해지면 별것도 아니야.”
“이래저래 불안한 게 많을 텐데.”
준코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별로 그럴 것도 없다고 했다. 마치 남의 얘기를 하는 듯한 대답이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되는 판에 혼인신고도 못 한 채 함께 살고 있다니.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첫 혼인신고를 했던 시즈에와는 행동도 생각하는 방식도 전혀 달랐다. 익숙해지면, 이라고 준코는 말했지만 이런 꼴로 살아가면서 대체 무엇에 익숙해진다는 것인가.
--- p.182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얘기만 늘어놓으며 공감해주기를 원하는 파트타임 동료들의 대화도 이 모자간에 비하면 처세술이 뛰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시즈에는 오랜 파트타임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 모인 여자들이 서로 얼마나 불행한지 경쟁하듯이 늘어놓는 장면을 수없이 보아왔다. 저마다 불행을 입에 올리면서 자기 쪽이 그나마 조금 낫다고 생각하는 얼굴들이었다.
--- p.184
항상 나오코의 행복을 빌고 있어.
편지와 전화로 지금까지 서로 이어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한 줄의 글을 몇 번이나 되짚어 읽으며 생각했다. 준코와 함께 야반도주한 남자에게는 당시 아내가 있었다. 나오코가 간호사 캡에 대한 자부심과 환자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자신의 미래를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던 무렵이었다.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은 아마 준코와 비슷한 시기에 경험했을 것이다. 과연 마흔 살이 넘도록 질질 끌고 올 만한 사랑이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묘한 반성까지 하게 된다. 지독한 사랑의 기억만으로 스스로를 지켜온 것은 나오코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차곡차곡 쌓아온 세월도 현실이다. 그동안의 희로애락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래도 왜 아버지와 어머니의 호흡기를 떼어드리지 못했을까.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현실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허망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항상 나오코의 행복을 빌고 있어.
문득 준코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준코를 만나, 후회도 여한도 없이 살아온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 p.222~223